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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Feb 06. 2021

디지털 시대의 장인은 무엇인가

장인의 공부를 읽고

한동안 책을 멀리했다.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제목의 책을 연달아 사고, 읽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두거나,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시 책을 가까이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내가 읽고 싶고, 필요한 책을 사서, 천천히라도 꼭 다 읽고, 짧게라도 독후감을 적은 후 다음 책을 사겠노라 다짐했다.


작년부터 지인 몇 명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부담 없이 시작한 독서 모임이라 작년에는 킥오프만 하고 책은 정작 한 권도 안 읽었다.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코로나 때문이라고 치자. 올해는 마음을 가다듬어서 한 달에 한 권, 각자 원하는 책을 골라서 읽고, 노션에 간단하게나마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여전히 부담 없이 게으르고, 느슨하게.



나는 장인의 공부라는 책을 골랐다. 세상을 바꾸는 광고인(?)의 꿈을 내려놓은 후로 누군가 나의 꿈이 무엇이고, 내가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명쾌한 대답 대신 우물쭈물하다가 얼버무리곤 했기 때문에 명쾌한 꿈을 갖고 있거나, 이미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같은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일해야 할지, 디지털 시대의 장인은 무엇을 말하는지 다른 분야에서 장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장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공부하고, 갈고닦는 지도 알고 싶었다. 문장 몇 개를 가져와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보자.



디자인 과정이란 실용적인 방법론과 기술로 문제를 명료화하고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이 아이디어를 시험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장인 정신이라고 하면 흔히 디테일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도 이른바 픽셀 퍼펙트를 추구하는 게 디자인 장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테일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문장을 읽으며 장인 정신이 무엇인지, 역할에 따라 디테일을 추구해야 하는 영역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추측하건대,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게 장인 정신은 사용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집요하고 파고들고, 우리 제품이 정말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지 꼼꼼하게 시험하고, 개선해나가려는 태도과 노력이 아닐까 싶다.



 장인이 각 단계에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이전 단계에서 쏟은 정성만큼이다.


생각해보면 리서치가 부족하면, 문제를 정의할 때 고생하고, 문제 정의가 부실하면, 디자인할 때 고생하고, 디자인이 꼼꼼하지 않으면, 개발할 때 고생했고, 그 단계를 거슬러 간다는 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니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늘 리서치를, 문제 정의를, 디자인을 꼼꼼하게 잘해 둘 걸 하는 후회를 했다. 결국 저자는 장인 정신이란,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각 단계마다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쏟으려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공예가 우리에게 이토록 튼 만족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예품이 갖는 물성을 통해 장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경험을 정리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 생각, 믿음이 현실로 구현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작업의 매 단계마다 그 결과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작업이 끝나면 자신의 노동이 맺은 열매가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내용이 내가 심리학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디지털 기획/전략 비슷한 일을 하다가 디자인을 업으로 바꾼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hands on, 혹은 get your hands dirty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이유도, 코딩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맥락에 있었다.


김서륭 작가님 Konstfack 졸업 전시


좋은 삶을 찾는다는 건 단지 어려운 분야를 하나 골라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삶을 찾는 것은 오히려 전설의 대륙과 신화에 나오는 도시를 상세히 묘사한 15세기 지도를 들고 미지의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러 떠나는 유럽의 탐험가가 되는 것과 같았다.


이 문장은 나는 아마도 행복, 성취, 만족 같이 추상적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니 그 여정 자체를 즐기고, 잘 기록해서 다른 이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도가 되어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정착을 바라던 때가 있었다. 스톡홀름 어디에도 마음 편히 내 몸 하나 건사할 공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을 것이다. 2년 2개월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다시는 이런 마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에서의 시간도 어느새 1년 반이 지났고, 나는 더 나은 삶 혹은 비슷한 무언가를 찾아 어딘가로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목표한 지점에 다다르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발아래의 산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봉우리일 것이다. (중략) 제작자이자 창조자로서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앞서 자신의 여정을 걷게 된다. 삶을 지배하는 창조적 열정을 발견하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있지만 저주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열정을 내가 아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동화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열린 결말처럼 무책임하지도 않다. 여정 뒤에는 또 다른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제품을 만드는 여정도 이와 같다.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면, 그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다. 어떤 제품을 만들고, 어떤 상을 받고, 어떤 회사에 가고, 어떤 직함을 얻더라도 실은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결국 저자는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사용성, 진정성, 간결함을 추구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여정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장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닐까?


다음에 오를 산은 어디인가


책을 읽은 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다만, 지금은 눈 앞에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산을 오를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만큼은 명쾌했다. 그 덕분에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지,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15년 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3년 후에는 정말 잘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차분히 답할 수 있었다. 


책은 거슬리는 문장이나 단어 없이 술술 읽혔다. 특히 저자의 여정과 경험이 담긴 챕터와 저자의 생각과 철학이 담긴 챕터가 구분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완급 조절하면서 끝까지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세련된 느낌의 Craft가 올드한 느낌의 공예로 번역되다 보니 머릿속에서 다시 Craft로 고치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번역 자체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책다웠다.

ps. 다음 책 추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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