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 좋고, 인심 후덕한 이웃과 오래도록 더불어 지낼 수 있는 터전. 기름진 들판에서 길러낸 넉넉한 먹거리로 가족을 먹이고 무탈하게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는 땅. 삶이 각박할수록 꿈은 더욱 절박해지는데, 고달픈 현실 너머 이상향을 꿈꾸는 인간의 바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랫동안 풍수를 연구해 왔던 최창조 교수는 『한국의 풍수지리』에서 그 이상 세계에 근접한 땅을 진안군 일대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을 품고 있는 진안군 백운면, 성수산 선각산 그리고 덕태산의 골짜기들은 깊다. 짧지 않은 물길을 따라 이어진 사람의 발길은 면 소재지가 있는 원촌으로 흘러든다. 오일장이 없어도 몇몇 가게들이 모여있고, 농협에서 운영하는 마트와 주유소가 있다. 우체국과 파출소 그리고 보건지소도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아직 남아 있다. 서른 명 정도 초등학생과 십여 명 중학생이 있어 많은 수는 아니어도 입학과 졸업식을 매년 치르고 있다. 짜장면을 파는 중국집과 치킨 가게도 하나씩 있다. 하지만 기와지붕에 염소 간판을 얹었던 ‘희망건강원’은 보이지 않고, 색이 바래 간판 글씨도 보이지 않는 ‘뉴상설신발가게’는 문을 닫았다. 이미 비워둔 지 오래된 ‘근대화상회’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간판에 역력하다.
2006년, 백운면 원촌마을 간판 바꾸기 사업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지역의 한 대학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22개 상점의 34개 간판을 새로 제작했다. 이제 갓 서예를 배우는 초등학생이 정성 들여 쓴 것 같은 손 글씨체로 가게 이름을 새기고 가게마다 독특하고 재미난 그림을 그리고 장식을 달았다. 공공미술이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소문을 듣고 경향 각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지자체 공무원들과 의원들이 견학을 다녀갔고, 중앙지와 지방신문들이 여러 차례 취재를 나왔다. 덕분에 길을 잃은 구름이나 쉬어갈 법한 산골짜기 마을이 들썩거렸다.
한 사진작가가 인근 정미소를 인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 농촌 마을의 풍요와 소통의 상징이었던 정미소에 꽂힌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사라져 가는 정미소의 기억을 사진에 담았다. 나름의 아픈 역사의 실타래 같은 것이어서 붙들고 싶어 시작했던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던 중 마령면 소재 계남 정미소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와 계약했다고 한다. 정미소를 전시 공간으로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름한 지붕에 올라 비가 새는 틈을 메우고, 알록달록한 칠을 새로 하고, 낡은 기계가 끼고 앉은 허드레 공간을 전시실로 꾸몄다. 간판도 내달았다.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그 옛날 마을의 정미소가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만큼 새로 단장한 전시 공간이 그 피를 물려받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2006년 봄, 개관전으로 기획한 전시는 ‘계남마을 사람들’이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마음 여는 일부터 시작했다. 낡은 고리짝을 열고, 장롱을 뒤져 꺼낸 흑백 사진들. 사진이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혼례식이나 마을 잔치 풍경, 아이들의 졸업식 장면 같은 기억들이 사진과 함께 소환됐다. 그렇게 100여 점 되는 사진들을 모아 새로 마련한 공간에 내걸었다. 사진전이 열리면서 뜻밖에 마법 같은 일도 벌어졌다. 사진 구경을 하려고 일부러 고향을 찾은 자식들 이야기로 정미소를 찾는 어르신들 얼굴에 모처럼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벌써 십 년이 훨씬 넘게 오래전 일이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잠시뿐이었다. 색 바랜 담벼락 벽화나 녹슨 양철 지붕처럼 다시 초라해져 갔다. 그해 가을처럼 코스모스는 다시 피었어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자동차가 남긴 궤적에 바람이 일어도 코스모스만 남겨진 풍경은 스산하다. 다시 찾은 계남정미소의 출입문은 낯선 손님을 전혀 들이지 않겠다는 듯 자물쇠가 입을 앙다물고 있다. 근황을 물어도 속을 비춰 보여주지 않는다. 개관 때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탈곡기도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밖으로 내걸린 현수막은 벌써 한 해 전 전시회 소식을 품고 탈색되어가고 있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백운면 인구는 1,928명이고, 지난달보다 12명 줄었다. 평균 연령이 58.2세다. 사정은 진안군 내 11개 읍면이 비슷하다. 읍내에 1만 명 정도가 모여 살고, 나머지 1만 5천 명이 10개 면에 흩어져 사는데 대략 천 명에서 2천 명 정도씩 된다. 백운면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고, 전라북도 다른 군에 비해 진안군의 인구감소 속도는 더딘 편이다. 적은 숫자지만 가끔 인구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귀농귀촌사업에 공을 들이고 마을 만들기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진안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지난번 총선 때, 유권자 수를 파악하기 위한 한 자료에는 성인이 아닌 아이들 비중이 열 명에 한 명도 안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이들이 없으면 학교가 문을 닫고 상점도 떠나기 마련이다. 결국 마을도 사라진다. 함께 살아왔던 추억도 낡아가던 기억도 마침내 소멸되고 말 것이다.
덕태산 쪽에서 흘러와 면 소재지를 가로지른 물길은 번암마을을 지나 섬진강을 만난다. 조금 더 가면 ‘백운면 물레방아’를 볼 수 있다. 동촌 정미소와 함께 진안의 가볼 만한 곳으로 종종 소개되는 장소다. 물을 끌어들여 수력으로 방아를 돌리는 물레방앗간이다. 빨간색 지붕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띈다. 섬진강 최상류지만 수량이 풍부해서 한때는 주변에 10여 개 물레방아가 몰려 있었다는데, 지금은 유일하게 남겨진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도르메 방앗간’이라고도 부른다. 딱히 찾는 걸음이 많지 않은 탓인지 문은 자주 잠겨 있고, 가끔 열린 뒷문으로 내부를 훔쳐볼 수는 있다. 물레방아는 돌지 않는다. 디딜방아도 절구에 공이를 처박은 채로 멈춰있다. 80킬로그램을 도정하면 4킬로그램 쌀로 도정료를 받는다. 운반비는 별도다. 방앗간에 들어서면 시간은 그때 시절에 멈춰 선다. 흐르지 않는다. 나만 남겨둔 채 강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