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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의 세상

by 물구나무

화엄사는 큰 절이다. 지리산을 끼고 앉은 대표적인 화엄 사찰이고, 마흔여 개 말사를 거느린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다. 가까이 천은사를 비롯하여 여수의 향일암과 멀리 부산의 해동용궁사가 모두 화엄사 소관이다.


신라 진흥왕 5년, 544년에 승려 연기가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인도에서 온 연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땅에 절을 짓고 화엄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화엄사를 세우고, 인근에 연곡사와 사성암도 지었다. 그는 출가한 어머니를 모시고 인도에서 함께 왔다고 하는데 효심이 남달랐다. 속세의 인연은 부처의 세계로 이어져 매일 차를 공양하기도 하고 불편한 노구를 업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화엄사를 증축한 자장이 연기조사의 효행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사사자 삼층석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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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왼편을 돌아 잠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이 석탑을 만날 수 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 아래쪽은 4면을 돌아가며 12구의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고, 위쪽 기단 네 귀퉁이에는 각각 표정이 다른 네 마리 사자가 석탑을 떠받치고 있다. 또한 한가운데 비구니상 역시 탑을 받들고 있는데,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사사자 삼층석탑은 정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공양하는 승려와 쌍을 이루어 전설을 완성하고 있는데, 효성이 지극했던 연기조사의 모습이다. 독특한 모양을 가진 이 탑은 흔히 불국사 다보탑과 비교되며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얼마 전 해체되어 복원작업을 마무리하며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었다.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사자 삼층석탑과 각황전을 포함해서 각황전 뜰 앞에 석등과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 등 국보만 해도 다섯 점이고 여덟 점의 보물과 두 건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한 마디로 화엄사는 발에 걸리는 국보급 보물이 널린 절이다. 장구한 역사의 무게만큼 화엄사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의상은 왕명을 받아 지금의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을 지어 키가 1장 6척(약 4.8미터)이나 되는 불상을 모셨고, 벽면에는 80권 분량에 달하던 화엄경을 석판에 새겨 보관했었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들은 화엄의 세상을 꿈꾸며 호국불교의 정신을 이곳에서 수련했고, 원효와 도선 같은 고승들도 거쳐 갔던 곳이다.


하지만 알려진 절의 역사는 속세의 잣대가 닿지 않는 영역이 있다.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사경 하나가 발견되었다. 사경寫經은 경문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꾸민 불경을 말하는데, 세로 29센티미터, 가로 1390.6센티미터 길이 두루마리 형태로 된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으로 국보 제196호다. 신라 경덕왕 13년, 754년에 황룡사 승려였던 연기법사가 간행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하였다. 이 사경의 발문에는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 제작 방법과 의식 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이 사경을 제작했던 연기법사가 바로 화엄사를 창건한 승려라는 것이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어, 사실이라면 화엄사의 시간은 뒤죽박죽 엉키고 창건 시기는 최소한 2백 년 뒤로 다시 쓰여야 한다. 속 사정은 알 수 없으나 화엄사는 여전히 진흥왕 5년, 544년을 고집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 되던 천년도량의 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의상은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그는 지금의 낙산사 관음굴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676년 문무왕의 뜻을 받아 봉황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삼천 제자를 모아 화엄 교학을 가르쳤다. 우주 만물은 서로 대립하지만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법계연기의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세계는 부처의 자비가 충만한 연화장의 세계다. 의상은 7언 30구의 게송 210개의 한자로 화엄의 세상을 요약한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이 곧 하나라고 말한다.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와 다르지 않고, 부처가 되고자 마음먹는 찰나가 곧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화엄경은 전하고 있다. 알 듯 모를 듯하다. 스님의 말은 언어가 얽어놓은 개념의 틀에 갇혀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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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속에 감춰진 세상, 연화장. 전쟁으로 피범벅 된 땅 위에 새로 피어날 세상, 통일을 이룬 나라의 중생들을 위한 새로운 믿음, 더 이상 대립과 갈등이 아닌 상생과 조화를 이루는 나라. 화엄의 세상을 연꽃에 비유한다면 차라리 이해가 빠르겠다. 죽음과 고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고결한 향기와 빛깔을 품고 피어나는 꽃, 매력적이다. 종교를 통해 구원받을 세상을 이처럼 선명하게 보여줄 꽃이 또 있을까. 꽃처럼 피어난 세상, 하지만 한 여름 연꽃도 잠시뿐이다.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뉘고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으로 뒤엉킨 시대에 화엄의 세상을 찾아가는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몇 해 전 기록적인 폭우로 화엄사 산문 밖이 온통 물바다로 변했던 적이 있었다.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의 범람으로 구례 읍내와 주변 지역이 모두 침수됐다. 수마를 피해 겨우 몸만 빠져나온 29명 이재민을 위해 화엄사는 도량 내 화엄원을 개방했다. 선원과 승가대학의 스님들은 승복 대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수해 현장을 찾았다. 공양미 50포대를 지역주민에게 긴급 지원하고, 공양간에서는 800인분 짜장면을 만들어 수해 복구 현장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제공했다. 조계종의 아름다운 동행 재단은 긴급구호키트 1600세트를 구례군에 전달했고, 구례불교사암연합회 명의로 2천만 원 성금을 기탁했다. 비록 정치인들처럼 화려하게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화엄사 스님들의 전통은 짧지 않다.


하동으로 이어지는 길목,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하동을 지나 구례로 쳐들어오던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승병 153명의 위령비가 있다. 이름조차 온전히 남겨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살다 갔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건 금으로 치장한 사경도 큰 절집도 아니다. 스님 하나하나가 꽃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우둔한 중생은 그저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연화장의 세상을 겨우 엿보고 있다.

천년도량 화엄사, 꽃처럼 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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