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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샘에서

by 물구나무

하나의 근본을 가진 산줄기는 만 갈래로 나뉘지만,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강은 하나로 흐른다. 덕유산과 지리산의 중간, 영취산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은 신무산과 팔공산을 지나 주화산까지 63.3킬로미터 북서진한다. 짧아도, 이 산줄기는 북으로 금강과 남으로 섬진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주화산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나뉘는데 호남정맥은 영산강과 섬진강의 경계를 이루며 광양 백운산까지 남도를 휘돌아 감는다.

46 데미샘.jpg 데미샘, 섬진강 발원지


천상데미봉 턱밑, 팔공산 북쪽 골짜기 데미샘에서 섬진강은 발원한다. 데미샘 자연 휴양림이 있는 진안 백운면 신암리에서 단풍나무와 참나무 무리가 우거지고 조릿대가 무성한 숲을 지나 다소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가면 작은 표지석과 쉼터가 하나 있다. 너덜갱이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은 섬진강이 품고 사는 삶들처럼 그저 소박하다. 고작 한 평도 안 되는 가을 하늘을 품고 있다. 손에 쥔 것은 도토리 몇 알, 젖은 단풍잎 몇 장이 전부다. 가난한 소작농의 큰 자식 같다. 작지만 마르지 않는 이 물길이 회문산과 지리산 그리고 백운산 골짜기를 끼고 흐르며 가난한 마을들을 지난다. 이른 봄 매화에 한눈팔다 너럭바위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파른 협곡을 숨죽여 흐르며 세상에 내어놓지 못한 제 출생의 비밀을 주워듣기도 한다. 장구목 협곡을 빠져나온 물길은 크지 않은 들판을 적셔 딸린 식구 먹여 살릴 만큼 제법 굵직한 골격을 갖춘다. 순창에서 남원 너머 곡성으로 전라도의 북과 남을 잇고 하동과 구례에 닿으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며 남해까지 흘러간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강과 달리 섬진강에는 하굿둑이 없다. 4대 강 사업이 추진되던 때도 대상에서 빠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사람들은 표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가난하고 목소리가 작은 탓이라면 서러운 일이지만, 그 덕에 낙동강에서는 사라진 재첩을 거둘 수 있고 해마다 은어가 돌아오고 너른 모래강변을 여전히 볼 수 있다. 강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인과 화가들을 잡아끄는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재첩생산량의 감소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물론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도 원인이겠지만 하류 지역 어민들은 강물이 줄어들면서 염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주민들이 전문가처럼 과학적인 근거를 들이대며 따질 수는 없겠지만 유역의 형편을 보면 결코 틀린 말도 아니다. 섬진강댐이 있는 상류에서는 동진강 유역으로 물이 산을 넘어간다. 주암호가 있는 보성강 상류 동복댐에 가둔 물은 광주와 목포가 있는 영산강 유역으로 빼가고, 도수터널을 통해 상사호로 옮긴 물은 여수공단으로 보내진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쌀 증산이 목숨처럼 시급했고, 조국 근대화의 길에 공업 경쟁력은 필수였다. 날로 늘어가는 대도시의 물 수요에 섬진강은 묵묵히 피 같은 제 물을 내어주어야 했다. 이러저러한 명분과 이유로 백 년 사이 강물은 줄어갔다. 그 비중이 81퍼센트에 달한다. 나머지 19퍼센트 수량만 남겨져 흐르고 있다. 섬진강은 겨우 흐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마을을 부르는 이름, 洞(동)은 ‘같은 물을 먹고 산다’는 뜻을 품고 있다. 물을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생명 공동체, 유역은 마을의 확장된 개념이다. 물은 세상 가장 낮은 곳을 더듬어 산허리를 돌고 골짜기를 지나며 길을 낸다. 상류에서 하류로 강마을에서 산골로 물길을 따라 사람의 길이 나고 그 길을 이어가며 삶을 엮어왔다. 말을 섞고 먹을 것을 나누며 피와 땅이 맺어준 인연으로 이웃이 가족이 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강의 역사는 유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산허리를 잘라 고속도로가 나고 물이 산을 넘어 흐르기도 하는 요즘 세상에 유역의 개념은 희박하다. 행정구역이 유역을 대신해서 세상을 구분하는 단위가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유역에 희망이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일본의 아사히 강(旭川) 유역 사람들이다. 아사히 강은 홋카이도가 아닌 혼슈 서부지역인 주고쿠 지방, 오카야마현에 있다. 북쪽의 고원산림지대에서 발원해서 현의 중앙부를 관통하며 흐르다 오카야마시를 거쳐 세토 내해로 빠져나간다. 142킬로미터 길이에 유역면적은 1,810제곱킬로미터로 섬진강에 비해 매우 작지만, 유역 내 88퍼센트가 산림이고 농지가 10퍼센트, 시가지 및 택지가 2퍼센트 남짓 차지하고 있어 형편은 엇비슷하다. 유역의 인구는 약 34만 명인데, 오카야마시를 제외한 상류 지역 도시와 농촌에서는 꾸준히 줄고 있다.

50 아사히강.jpg 아사히 강을 끼고 앉은 오카야마성


1997년 일단의 사람들이 원류비를 세우기로 한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고, 환경피해도 없고, 무엇보다 돈이 적게 드는 방법을 모색한다. 고민 끝에 하구에서 발원지까지 리어카로 옮기기로 했다. 140킬로미터를 50일 동안 유역의 단체들이 번갈아 가며 운반했다. 깃발을 앞세우고 돌아가며 리어카를 끌어서 아사히 강을 거슬러 올랐다. 비가 오면 우산을 받고 걸었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알아서 해결했다. 마침내 원류비를 세우기 전날, 리어카 운반에 참여한 38개 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심포지엄을 열고 ‘아시히강유역네트워크’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제일 큰 지류가 있는 신조 강의 원류에도 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어 리어카 여행을 이어갔다. 내친김에 약 140개 지천 모두에 원류비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아사히 강 유역네트워크 사람들은 이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 매년 하나씩 140년이 걸릴 것이고 이 꿈이 이루어질 즈음이면 아무도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겠지만, 이들은 리어카 여행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시작이 해를 거듭해 가면서 소중한 전통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들은 이 소박한 행사를 핑계로 얼굴을 보고 같이 걷고 술을 나누며 말을 섞는다. 유역의 크고 작은 소식들을 모아 뉴스도 발행한다. 유역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안과 갈등에 특별한 전략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주 만나고 지혜를 모아가다 보면 문제가 풀리지 않겠냐는 식이다. 섬진강도 그렇게 풀어갈 수 있을까. 약 280개 지천마다 표지석을 세우면 물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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