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무라카미 라디오

변화의 미풍

by 진초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을 가슴에 품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친구여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책을 들고 나타나곤 했는데,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도 얇은 책인데, 속독까지 배운 친구가 그때껏 다 읽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직도 그거 읽고 있어?”

“아껴서 조금씩 읽고 있어.”

친구는 그 말을 하면서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을 떠올리듯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책 읽으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어쩌다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눈은 활자를 쫓는데 머릿속에는 이내 다른 생각이 들어 차버리곤 했다. 처음 명상을 배울 때와 비슷했다. 의식을 호흡에 집중하다가도 ‘오늘 저녁에 뭐 먹지?’라는 생각에 빠지는 식으로. 만화책조차 읽기가 싫었으니, 난독증을 의심해 본 것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 친구와 연락이 닿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책을 안고 행복하게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이 사람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니…. 친구가 가슴에 품고 다니던, 『무라카미 라디오』 그 책이 궁금해졌다. 다음날 서점에 가서 책을 펼치자 흥미로운 소제목들이 목록을 채우고 있었다. ‘크로켓과의 밀월’, ‘파스타라도 삶아라!’, ‘하늘 위의 블러디 메리’……. 서서 몇 쪽 읽다 보니 작가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볍고 느슨한 내용이어서 술술 읽히기도 했고, 별것 아닌 일상이 귀엽게 느껴져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책을 사서 나오는 길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흘려보냈던 것이 뒤늦게 영향을 주고, 나를 움직이게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어딘가 새로운 길로 들어선 기분, 새로운 문이 조금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라카미 라디오』가 출간됐던 2001년도를 떠올리니 종이책이 주는 낭만이 새삼 그립다. 한번은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빵 가게 재습격』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처럼 종이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 그것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다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작가의 이전글배움 위에 계절을 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