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것부터 해서, 나아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일상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더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 그 목적과 의미는 다를지라도 무언가를 배워 몸에 익히고, 알아차리는 데까지는 반드시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일일시호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20년 넘게 다도를 배우며 성장해 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처음에는 차 수건 접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어렵고, 퇴수, 찻잔, 차통……. 순서에 맞게 손을 움직이는 것도 여간 헷갈리는 일이 아니다. 실수를 거듭하며 힘들어하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머리로 따지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때. 손을 믿고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다고. 어느 순간 이제는 다 알 것 같다가 마음속 파장으로 돌연 원점에 놓이는 때에도 다시, 또다시 시간을 들이다 보면 순서를 따지며 외우지 않아도 몸짓이 조용히 흐르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몸이 아닌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도 그렇다. 계절을 느끼는 법도, 조급해 하지 않는 법도, 차분한 마음 상태를 가지는 법도 스승의 가르침만으로는 머릿속 생각을 깨고 단번에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주인공은 더운물과 찬물의 그 미세한 소리의 차이를 알아차린다. 더운물은 뭉근한 소리, 찬물은 경쾌한 소리. 머리로 배운 기술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익숙해지도록 하여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느라 끙끙대던 때를 돌아보면, 아무리 머리로 배우려고 해도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고, 스승 고타마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이 찾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스승 고타마의 깨달음 자체는 완전했지만, 스승의 길을 따라 걷는다고 해서 그 깨달음이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배움을 뒤로하고 세속으로 내려와 온몸으로 삶의 다양한 면을 마주한다. 욕망, 쾌락, 도취를 거쳐 허무와 자기 혐오를 느끼고 나서야 진정한 평온 속에서 삶과 존재 전체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살아낸 세월의 끝에, 깨달음은 직접 겪는 삶 전체에서, 스스로 체험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우리는 삶의 길을 배우지만, 몸소 길 위에 서야만 방향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가르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배움은 외부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지만, 완성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당장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 일이 있거나, 무언가를 깨우치기 위해 조급한 마음이 든다하더라도 그저 묵묵히 배움 위에, 겪어 내는 시간 위에 계절을 쌓아보자. 다가올 추운 계절에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고, 신록의 계절에 움트는 새싹을 기다리며 시간을 들이다 보면, 어느새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