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과 불안감 그 중간 어딘가
뉴스에서 주구장창 나오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대기업 직급별 평균연봉' 등. 그 외에도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성과급, 파인다이닝(fine dining), 1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 명품, 새로 뽑은 차. 마치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될 것만 같은 달콤한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세상에 대기업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기업은 참 좋은 삶을 약속해 줄 것만 같은 어감의 조직이다.
나의 아버지는 대기업을 30년 근속하셨다. 어릴 적 거의 매일 밤늦게 우리가 잠들어있을 때 퇴근하셨고, 주말에도 회사로 불려 가시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 덕분에 집안의 경제사정이 매년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는 있었다. 무의식 중에 대기업이라는 것은 안전하고 좋은 것이라는 인상이 박히게 되었다. 삶의 좋은 것을 웬만하면 놓치지 않고 중간 이상은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뒤쳐지지는 않겠다는 안도감.
나는 돈 모으는 걸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친한 동기에게 '김생민의 영수증' 찍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그냥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걸 게임머니 모으듯이 즐겁게 감상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나에게 대기업을 다니면서 월급을 받는 건 꽤 괜찮은 삶의 노선 중 하나였다.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제대로 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고, 식당에 가서 명함 당첨 이벤트를 하는 걸 보면 자신 있게 명함을 꺼내 넣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서 '나 이 회사 다녀!' 하고 자랑스레 말할 수도 있고, 주말에는 차를 빌려서 근교 이곳저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대출도 나오고. 이대로 계속 가면 괜찮을 것만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대기업의 여러 부분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동기들이었다. 공채를 통해 한 번에 신입사원을 뭉텅이로 뽑으니, 비슷한 경험치의 친구들과 사회생활을 함께 시작하게 되는 환경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같이 비슷하게 돈을 버는 동기들과 맛집을 찾아가거나 쇼핑, 여행을 가는 것이 일상의 큰 낙이었다.
특히 나보다 나이가 적게는 두 살에서 많게는 다섯 살 이상까지도 차이나는 동기 오빠들을 보고 많이 배웠다. 오빠들은 왜 그렇게 사회생활을 잘하느냐고 물으면, "군대를 다녀온 짬바가 있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깍듯하게 인사하고, 받은 일은 척척 잘 해내고, 힘들 것 같은데도 힘든 내색 하나 안 하는 오빠들이 참 멋져 보였다. 나도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면 회사생활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은퇴하셨을 때 많이 힘들어하셨던 게 기억난다. 매일 회사를 다니는 것이 인생의 큰 부분이셨기에, 막상 은퇴하고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줄 몰라 처음에는 매우 공허해하셨다.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워봐!'라며 언니와 내가 열심히 설득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은퇴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내면에 항상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고, 평생 한 회사를 다닐 수는 없으며,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 것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꾸준히 나를 괴롭혔다. 작은 돌도 처음에는 가볍지만 계속 들고 있으면 팔이 저려오듯이, 이 막연한 불안감도 조금씩 내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성과평가에 따라 연봉이 갈리는 기업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성과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올 한 해 목표를 수립하고, 연말이 되면 그 목표를 점검하고 평가를 받는다. 조직차원에서 내려오는 압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강력했다. 직급별로 어느 정도 기대치에 부응을 해야 되고, 내 위치에서 적합한 역할을 수행해야 된다는 압박감은 일 년 내내 직원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오늘 하루에 반드시 끝내야겠다고 목표한 10가지를 써도, 시시때때로 여타 부서에서 들어오는 요청을 받아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리스트는 점점 더 길어지고 그에 따라 퇴근 시간도 늦어져 간다.
일을 할 때에도 윗사람에게 '못 하겠어요'라는 말은 하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일이 너무 힘들더라도 '주변에 같이 일하는 동기들도 묵묵히 하고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라며 거듭 용기 내기를 수십 수백 번. 이게 힘든 건가? 내가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닐까? 동기들도 하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라며 자연스레 동기들과 나를 동일선상에 두었다. 그렇게 조금씩은 내 색깔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이런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마음과 루틴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 왔다.
때 되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회사원의 '안정적인 삶'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내가 그 밖으로 나간다는 상상만 하면 매우 불안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내게 있어 그건 진짜 안정적인 삶이 아닌, 안정적일 거라고 말로만 들어온 삶이었다. 회사 안에서 점점 커져가던 불안은 결국 터져버렸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가득 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