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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Jul 11. 2023

고시원 요리왕의 소확행

누구나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

고시원에는 4평짜리 작은 공용주방이 있다.


2구짜리 인덕션과, 전자레인지 2개, 90L짜리 냉장고와 밥솥, 정수기가 있다. 폭은 좁지만 기다란 아일랜드 식탁과 스툴 두 개가 놓여있는 아늑한(?) 공간이다. 42명이 쓰기엔 좀 비좁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공간이다.  처음에 고시원을 하기 위해 임장을 다녔을 때 들쥐가 나올 것만 같은 험악한 주방을 몇 번 경험하고는, 며칠째 주방에만 들어가면 그 장면이 생각나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고시원을 인수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을 전면 리모델링 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요즘 젊은 원장님들이 새롭게 인수해서 운영하는 고시원 중 많은 고시원이 <오늘의 집> 뺨치는 감각으로 각 방은 물론 공용공간까지 예쁘게 인테리어를 하고 새 단장을 하는 추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고시원에 가면 안마의자도 있고, 운동하는 공간도 있고, 스터디룸도 있어서 젊은 친구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열악한 환경인 곳도 많다.



내가 인수한 고시원 공용주방의 첫 상태는 대략 난감이었다. 기존의 싱크대는 할머니의 옥반지가 생각나는 초록빛 시트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오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판은 눅눅한 습기를 먹어 뒤틀려 있어 문 아귀도 잘 맞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시커먼 기름때와 먼지들이 애처롭게 눌어붙어 있었다. 여기서 밥을 먹으면 그 어떤 진수성찬도 그저 그런 맛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공용 주방의 상태가 이렇게나 심각한데, 고시원은 늘 만실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고백한 건데, 이러한 점 때문에 주방 리모델링 공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긴 했다. 굳이 수리를 하지 않아도 이미 영업이 잘 되고 있으니 투자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인수를 하기 전부터 고시원 청소를 도맡아 주시는 청소이모님께서 공사 계획을 들으시고는 예기치 못한 반응을 보이셨다.



"아니 아직 쓸만한데.. 뭐 하러 돈 들여서 수리를 해? 그냥 써 그냥.. 초보 원장님이라서 잘 모르시나. 여기 사람들은 다 이 정도면 만족하고 알아서 잘 쓴다니까. 다른 곳에 비하면 여기 주방은 호텔이야. 에고 돈 아까워~!"

“에이.. 이모님~ 그래도 좀 깨끗해지면 좋지 않을까요..? 너무 낡아서 청소해도 티도 안 나요. 다른 곳은 대체 어떻길래.."



청소 이모님은 그야말로 고시원계의 슈퍼우먼 이신대 주마다 요일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간 3-4개의 고시원 청소를 맡고 계신다. 다양한 고시원에서 수년간 청소 업무를 하시며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신 위엄 있는 분이기에, 그분이 고시원에 관하여 하는 말이라면 결코 흘려들어선 안된다.



이모님 말씀처럼, 나라면 이런 캐캐묵은 주방에서 도저히 밥을 해 먹을 수 없을 것 같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인수한 고시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늘 만실로 운영되며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다. 하긴 임장 때 보았던 처참한 고시원도 영업은 잘 된다고 했으니 그에 비하면 우리 고시원 주방은 청소 이모님 말씀처럼 호텔급 주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으니 순응하게 된 것일까?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개선을 요구할 의지는 없었던 것일까? 혹은 본인들이 지불하는 금액의 권리가 딱 그만큼이라 여기고 그저 체념한걸까.



어쨌든 나는 이러한 내적 갈등과 청소 이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화이트&우드톤의 갬성 한 스푼을 담은 공용 주방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화이트&우드 감성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어쩐지 고시원에 썩 어울리는 컨셉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싸구려 반짝이 하이글로시 싱크대를 선택하자니, 아주 저렴하게 공사를 해결하고 싶은 나의 옹졸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결국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공용주방 공간만 바꿨을 뿐인데, 생긴 놀라운 변화들


그런데 주방 공간을 조금이나마 화사하게 바꾸자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간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편의점 음식이나 남은 배달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하나둘씩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 남편과 내가 눈여겨보며 애정하는, 요리왕이라는 애칭을 가진 한 남자 입실자가 있었다. (물론 우리가

남몰래 지어준 별명이다.) 그 입실자가 주방에서 볶음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손목의 스냅이 남달라 넋을 잃고 보게 되곤 했다. 요리왕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하루에 한 번씩 각종 재료들을 챙겨 고시원 주방으로 다시 두 번째 출근을 했다.



어느 날은 제육볶음 어느 날은 오징어볶음 어느 날은 된장찌개와 계란찜을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파전을 부치고 가끔 김치 빈대떡과 같은 별미도 해 먹었다. 워킹맘인 나의 최대 난제 중 하나는 '오늘 저녁 뭐 먹지?'인데, 요리왕의 메뉴선정과 레시피를 참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요리왕은 자기 얼굴과 닮은 동그란 쟁반에 야무지게 정갈한 한 끼를 차려 방으로 가져갔는데, 그 발걸음이 프라이팬을 다루던 화려한 손목 스냅만큼이나 꽤나 경쾌해 보였다.



사실 고시원 원장에게 있어 요리왕은 반가운 캐릭터는 아니다. 주방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방 시설이나 위생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나 음식 냄새와 관련된 민원이 생길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요리왕은 뒤처리까지 정말 완벽한 요리사였다. 수시로 공용 주방을 본인 집처럼 쓸고 닦고 하는 통에 오히려 고시원 주방은 늘 깨끗하게 유지되었고, 우리는 요리왕을 애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날은 고시원 택배함에 로켓프레시 배달이 잔뜩 와있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이렇게 열심히 주문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요리왕이 시킨 각종 재료들이었다. 싱싱한 호박과 당근, 돼지고기, 국산 콩 두부, 심지어 청국장도 있었다. 오늘 저녁은 제육볶음과 청국장인 건가...? 청국장은 냄새가 무척 심할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청국장 냄새로 민원을 받아도 좋으니 매일 밤 주야장천 라면 3개만 끓여 먹던 배달 청년도 차라리 요리왕처럼 맛있는 한 끼를 해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렇게나 요리에 진심인 사람이 그동안 주방엔 코빼기도 안 비추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동안 요리가 하고 싶어 얼마나 근질근질 했을까. 만일 그에게 고시원이 아닌 집이 있었다면 아마 가장 먼저 주방을 멋지게 꾸미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도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데 요리 솜씨가 어쩜 그리 야무진 것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근처 호텔 주방에서 일하는 진짜 '요리사'였다. 어쩐지 재료 선택이 찰지더라니.




사실 나는 결혼 10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 살아가는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배달음식과 외식을 응당 누려야 할 권리로 합리화하기 바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정성 들여 밥을 ‘제대로’ 차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아득했다. 이사 올 때 리모델링한 근사한 우리 집 주방은 계속해서 임시 휴업 상태나 다름없다.



연봉 1억 타이틀에 취해 거들먹거리는 워킹맘답게 어느 순간부터 돈 벌기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손가락 클릭 몇 번이면 온갖 산해진미를 방구석에서 맛볼 수 있는 세상이니, 배달 음식은 차마 뿌리치기 힘든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값지고 소문난 맛집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도 먹고 나면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헛헛한 감정이 들곤 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요리왕은 오늘도 4평짜리 고시원 공용 주방에서 기꺼이 요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2평 남짓한 비좁은 방이지만 자신만의 공간에서 완벽한 한 끼를 먹을 것이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에는 아마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른 배를 쓰담쓰담하다가 스마트폰과 함께 스르르 기분 좋은 잠이 들 것이다.



허름한 곳에 산다고
먹는 음식까지 초라하란 법은 없다.
반대로, 근사한 곳에 산다고
삼시 세 끼가 늘 소고기 일리도 없다.


나도 한 때 신림동 원룸을 전전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시원 보다는 두 뺨 정도 넓어 보이는 작은 원룸에서 고향 친구와 함께 살았다. 그 시절 우리는 가난했지만, 퇴근하고 만나면 늘 집에서 뭐먹지?를 고민하며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가끔은 삼겹살 집 가서 외식도 했지만, 김치볶음밥에 반숙 계란만 얹어 먹어도 너무 맛있어서 연신 친구의 요리 실력을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먹었던 밥심으로 원룸에서 투룸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조금씩 넓혀가며 여기까지 왔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건 힘들어도 귀찮아도 나를 위해 열심히 밥을 챙겨 먹던 부지런함과 자기애였다.



고시원에 살든 반포 원베xx에 살든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종일 고생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만을 위한 정갈한 한 끼를 스스로에게 대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환경과 자기애가 담긴 작은 정성이 아닐까. 오늘의 그 작은 노력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는 좀 더 단단한 마음과 든든한 밥심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용기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내적 갈등과 주변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시원 공용주방 리모델링은 정말 잘한 일 같다. 게다가 수리비는 좀 더 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우드 갬성을 담은 것은 정말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요리왕과 주방의 분위기가 참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요리왕도 내 인테리어 감각을 맘에 들어하는 눈치다.)



요리왕은 이제 곧 우리 고시원을 떠난다. 다음 주에 군대에 간다고 한다. 아쉬운 이별이다. 벤치마킹 할 요리사가 사라진다. 하지만 부디 그곳에서도 요리왕답게 요리 실력을 뽐내며 씩씩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네,
오늘 저녁은.. 뭐 먹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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