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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Jul 10. 2023

2평남짓 고시원에 사는 기러기아빠 김씨의 사연[2편]

그래서 미납자 김 씨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딱 3일 드리겠습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번엔 정말 짐 싸셔야 할 거예요.
저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라서요.


결국 기러기 아빠 김 씨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어린 딸과 와이프와 떨어져 살며 2평짜리 고시원에서 생존하고 있는 김 씨에게 잠시 연민을 느꼈었다. 같은 부모의 입장으로 동정심도 가졌었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진짜 한계가 왔다. 내 아무리 맘씨 좋은 고시원 원장이라 할지라도 엄연한 자영업자인데, 밥은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괜한 동정심으로 처음부터 여지를 준 내 잘못이다. 딱 일주일만 더 달라던 김 씨는 차일피일 월세를 미루어왔다. 그런데 더욱더 속 터지는 것은 교묘하게도 찔끔찔끔 납부를 해서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처음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자 김 씨는 월세 35만 원 중 10만 원만 입금했다.


"제가 지금 여러 방면으로... 해결을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단 일부라도 입금할 테니.. 조금만 더 사정을 봐주시면.... 안될까요.?" 


매번 이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면 남은 25만 원 중 10만 원만 입금했다. 그리고 15만 원이 남았을 때는 5만 원만 입금했다. 아예 안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는 것도 아니고... 매번 사정을 봐달라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는 김 씨를 무작정 내쫓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주에 걸쳐 찔끔찔끔 돈을 입금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다시 다음 달 납기일이 돌아와 10만 원이었던 미납금은 또다시 45만 원이 되는 식이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디 엄한 곳에다가 쓰고, 내가 매몰차게 내쫓지 못할 만큼 최소한의 금액만 전략적으로 입금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김 씨가 계산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초보 원장의 연민을 역이용할 줄 아는 교활한 사기꾼임이 자명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가고 나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 고시원을 인수하기도 전부터 장기간 입실하고 계셨기도 하였고, 사정이 딱해 보여 웬만하면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지금껏 내가 그 인간의 정확한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무거운 가장의 어깨를 가진 꽤 착실한 기러기 아빠로 그를 미화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외도로 인해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고시원에 묵고 있는 것이라면?

만약, 하고 있던 사업이 쫄딱 망해서 집안을 거덜 내놓고 도망치듯 혼자 나와 사는 것이라면?

만약, 주식이나 비트코인 한다고 전재산을 날려 먹고 혼자 맘 편히 독립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카카오톡에 걸어둔 행복한 가족사진, 촌스럽긴 하지만 깔끔한 차림으로 매일 규칙적으로 오가는 회사, 그간 꼬박꼬박 내던 입실료를 증거로 나는 김 씨를 가슴 시린 사연을 가진 착한 가장일 것이라고 믿어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늦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애처롭게 2평 남짓 고시원 방으로 들어가던 김 씨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온정이 넘치는 고시원 원장이었다. 하지만 김 씨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입실료 미납'이라는 뜻밖의 사건을 계기로 180도 달라져가고 있었다.


역시 돈 앞에 장사 없는 것일까? 제발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간절히 말을 했건만...! 만일 김 씨가 제 때 돈을 입금했다면,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내 기억 속에서 그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김 씨 이야기나 나와서 말인데, 생각나는 또 한 명의 입실자가 있다. 배달 알바를 하던 20대 초반의 입실자였다. 


그 청년은 매일 밤 12시 혹은 새벽 1시쯤 저녁을 라면으로 때웠는데, 퉁퉁한 체격만큼이나 먹성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CCTV를 보면 꼭 3봉씩 라면을 끓여 먹고 냄비채 밥까지 말아먹곤 했다. 식성이 참 좋아 보였는데 늘 라면만 먹는 것이 참으로 맘을 짠하게 하던 청년이었다.


우리 고시원에는 제일 작은 방, 중간 크기의 넓은 방, 가장 큰 방이 있다. 그는 제일 작지도, 제일 크지도 않은 중간 방에 묵고 있었다. 방의 크기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더 비싼 입실료를 내고 있다는 말이며, 그 말인즉슨 고시원 원장에게 좀 더 중요한 고객이라는 뜻이다. 무려 50만 원의 입실료를 내는 고객님이시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고시원의 입실료는 비행기 티켓과 같다.


가장 크고 비싼 방=first class =VVIP

중간 크기의 방=business class=VIP

가장 작은 방=Standard calss=?


이렇게 입실료로 등급을 매기는 것이 좀 속물스럽긴 하지만, 돈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 어디 고시원뿐이랴. 그러니 나를 그렇게 속물 취급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꼬리칸이 있던 영화 설국열차가 떠오르는건 나 뿐인가.


참고로, 보통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20~30대의 젊은이들은 30~40만 원대의 가성비 룸을 선호하는 편이다. 50만 원 이상의 중간방 혹은 넓은 방에 사는 입실자들은 확률적으로 번듯한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거나 부모님이 돈을 내주시는 수험생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방에서 올라와 배달 알바를 하는 20대 청년이 50만 원짜리 방에 사는 걸 보고 배달 기사 수입이 꽤 짭짤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외출이 줄어들고 배달 음식을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배달 전문 음식점들도 대박이 났거니와, 덩달아 배달 기사들도 수입이 늘어나 연봉 1억을 받는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덧 코로나가 한풀 꺾이고 지긋지긋한 감금생활과 억압된 자유에 지쳐갈 때쯤, 사람들은 해방을 갈구하며 하나 둘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배달업종 또한 하락세를 걷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꼬박꼬박 입실료를 내던 배달 청년은 그 무렵부터 갑자기 월세를 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출처: TV조선뉴스 기사(2021)
출처: 아시아경제 기사(2023)


나는 이미 김 씨 사건을 겪으며 이골이 난 상태로 이 청년에게는 그 어떤 신뢰나 희망도 걸지 않았다. 쓸데없는 동정심이나 연민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맘씨가 따수운 초보 원장에서 메마른 가슴의 베테랑 원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허나, 김 씨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청년의 멱살을 잡을 만큼 아직 독해 지지 못했다. 결국 그는 90만 원가량의 미수금을 남긴 채 우리에게 슬픈 이별을 고했다.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거 같아요. 그동안 사정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돈은 꼭 늦더라도 입금해 드릴게요…. 진짜 면목 없습니다.."

"그래요…. 어느 쪽으로 가요?"

"목포요. 어머님 혼자 계시는 본가로 갈려고요."

"네, 잘 가시고… 가셔서 자리 잡으시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 내용 증명 보내는 일 없게. 좀 부탁드릴게요."

"네.."




김 씨에게 최후통첩을 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른 아침 고시원에 들려 주방 청소를 하고 있는데 공용 식탁에 검은색 찌꺼기 같은 것들이 연필심 가루처럼 굴러다녔다. 날벌레 사채 들인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싶어 청소 후 CCTV를 돌려봤다. 만일 벌레라면 방역 업체를 부를 참이었다.


지난밤 공용주방을 마지막으로 이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 씨였다. 김 씨는 한껏 어깨를 웅크린 채로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것처럼 보였다.


편지라도 쓰는 것인가? 내가 나가라고 했다고.. 설마 사죄의 편지라도 남기고 야반도주라도 하려는 건가?

나는 집게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화면을 최대한 확대해 보다가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김 씨가 심각한 얼굴로
복권을 열심히 긁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상한 검은 가루의 정체는 김 씨의 절박한 심정이 담긴, 복권 잔해물로 판명 났다.


복권이라니… 복권이라니. 하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정신력을 높이 사야 할지, 나가서 배달 알바라도 해야 할 판인데 한가롭게 복권이나 긁고 있는 여유를 흉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벌레 사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방역은 안 불러도 되겠네..ㅎㅎ.'


한편, 배달 청년은 그동안 세 번에 걸쳐 입금을 해왔는데 그날 저녁 40만 원 입금을 끝으로 (90만 원 중 10만 원 미납금을 남겼지만) 꼬박 80만 원을 채웠다. 남은 10만 원은 더 이상 독촉하지 않기로 했다. 믿었던 누군가는 한가롭게 복권이나 긁고 있는데, 나름 매정하게 내치며 사무적으로 대했던 배달 청년은 그래도 끝까지 선방해 줬기에 되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러기 김 씨에게는 아직도 15만 원의 미납금이 있다. 2주 뒤면 다시 다음 달이 돌아와 45만 원이 되겠지만, 어쩐지 징글징글한 인연이 쉽게 끊어질 거 같지 않은 예감이 들어 오늘 밤 기도를 할까 한다.



하느님, 제발 김 씨 복권
좀 당첨되게 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작가 진담입니다. <고시원에 사는 42세 기러기아빠 김 씨 아저씨의 사연>​이라는 글을 올리고 나서, 그 뒷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 두 번째 에피소드를 썼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분들이 저의 글에 호응해 주셔서 브런치 스토리에 고시원 시리즈를 연재 한 지 2주 만에 오늘 기준(23.07.10) 전체 조회수가 20만 뷰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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