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원래 어렵다는 착각 (ft. 제텔카스텐)

당신의 글쓰기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

by 지니

1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왔다. 연구란 지식 생산의 최끝단에 위치한 일이다.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내용과 관련하여 질문하고 그에 맞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말이다. 연구에 있어 읽고 쓰기는 기본이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분석하며 읽고 논리적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찾고 보완하여 더 나은 연구들을 디자인하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진리에 가까운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늘 읽고 쓰는 삶을 사는 나에게도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논문을 쓰고자 blank screen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무슨 문장부터 시작해야 하나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그런 경험들과 더불어 지난한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 논문 리뷰 과정을 거치면서 글쓰기는 원래 어려운 task로 인지되어 버렸다.


모두들 '글쓰기는 원래 어려운 것'이라고들 했지만 어느 분야에나 다작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연구자들 중에도 매년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분들이 있다. 다작의 비결을 물어볼 때면 그들은 대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결이 어디 있어요? 그냥 매일 쓰는 거죠.'라고만 했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써야 한다.' 늘 듣던 말이다. 진리란 원래 단순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새로울 것 없는 정보 때문이었는지 나의 뇌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곤 했다. 그들의 전공분야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저분은 실험 연구를 하지 않으니 매일 글 쓴다는 게 가능하지. 실험을 해야 나로서는 새로운 실험 디자인하랴, 실험 세팅하랴, 데이터 컬렉션 하랴, 새로운 분석 방법 배우랴 도저히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인데... 더군다나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논문을 진행하지? 아무런 finding이 없으면 그 실험 결과를 발표하지도 못하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며 자위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런 나의 자의식을 완전히 해체한 학자를 알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 교수님이었다. 그는 30년 가까이 학자로 지내면서 약 70여 편의 저서와 4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셨다고 한다. 그에 대해 듣자마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미친 생산성이네. 그게 가능해?'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논문과 저서 대부분이 혼자 작업한 것이고 그의 연구 조수는 단지 '철자 오류' 정도만을 점검하는 proofreading을 했다는 것이다. 논문 출판 과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사람들이 그를 왜 '악마와 거래한 사람'이라 이야기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나니 그의 글쓰기 비법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다작 비결을 비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꾸준히 그의 비법이 'Zettelkasten (제텔카스텐) = Zettel (메모) + kasten (상자)' 즉, 메모 상자에 있음을 밝혀왔다.



qcp6twr7ibvggk4zllyfgzm0x15i 니콜라스 루만 교수의 제텔카스텐 (메모 상자)



'자신보다 똑똑한 연구 조수'라 표현한 제텔카스텐을 만들어가는 그의 방식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었다.

1. 관심 있는 주제와 관련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요약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사이트를 덧붙여 메모한다 (서지정보도 함께 남긴다)

2. 같은 주제에 대한 메모들을 가까이에 모아 두고 (주제별 메모 상자 사용) 서로 관련된 정보들은 표시해 둔다 (현대의 하이퍼링크 기능)

3. 수시로 메모들을 들여다보면서 영감을 얻는다 (Serendipity)

4. 특정 주제와 관련된 메모들이 충분히 모이면 그와 관련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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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루만 교수의 제텔카스텐을 알고 난 후 난 유레카를 외쳤다. 글쓰기 과정과 관련된 나의 인식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글쓰기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엔 논문을 읽으며 PDF 모퉁이에 나만의 critical summary를 남겨 놓았다. 문제는 그렇게 남겨진 메모들이 READING MODE에 있을 때는 서로 연결되다가 실험을 진행하든 분석을 하든 다른 업무로 전환되어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다 오면 또다시 까마득해지는 게 문제였다. 각 논문을 중심으로 내 메모를 흩어놓을게 아니라 반대로 한 주제와 관련해 내가 메모한 것들을 모아 정리해두어야 내 생각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들이 정확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텔카스텐을 이용한 루만 교수의 집필 과정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그것과 동일했다. 다작하는 많은 작가들이 모두 평소에 책을 읽거나 영감이 떠올랐을 때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메모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리하고 생각들을 연결시키며 글을 쓰는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 이미 자신만의 방법으로 제텔카스텐을 구축하고 운영하고 있었기에 '평소에 메모를 습관화하라' '글을 자주 쓰라'라는 말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글쓰기 전체 과정과 관련된 작가의 시스템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고 '00 하라'는 분절된 그들의 말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구축한 제텔카스텐이 그렇게 체계화되지 않아서 혹은 누구나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글쓰기 과정 혹은 책을 쓰는 과정에서 누구나 루만 교수님이 이야기하시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글이나 책을 쉽게 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결국 평소에 자신이 글쓰기 재료들 (자신의 생각 모음 +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준비해 놓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처럼 평소 독서할 때 (혹은 다양한 매체 통해 인풋을 받아들일 때) 나에게 영감을 준 자료들을 잘 수집해 메모해 두고 (collect the dots), 글을 쓸 때 번역하듯 그 생각의 조각 모음들을 잘 엮어가면 되는 것이다 (connect the d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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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그렇게 탄생하였다. 제텔카스텐과 관련된 정보와 그에 대한 나의 인사이트들을 메모 형식으로 모았다. 그러고 나서 제텔카스텐과 글쓰기를 주제로 한 '나의 생각 단위들을 그 주제에 맞춰 재배열하고 최대한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확실히 글쓰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특정 주제와 관련된 몇 개의 글감만 모여져도 그와 관련된 글이 쓰고 싶어지고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책의 목차가 구성되는 걸 경험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읽고 쓰는 삶을 꿈꾼다. 누군가가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는 말에 어떤 한 작가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글을 쓰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이미 작가입니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 말의 울림이 컸다. 그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어디에든 꾸준히 글을 쓰고 있어야 작가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글을 갑자기 잘 쓰게 되는 경우는 없다. 헤밍웨이도 자기 자신의 초고는 쓰레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글쓰기 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하던 마찬가지다. 한 순간에 잘하게 되는 기적은 없다. Bit by bit everyday... 사실 기적의 다른 이름은 "매일 매일 꾸준히"임을 이젠 잘 안다. 조금씩 꾸준히 글을 쓰며 작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특히 '쓰는 과정에서 오는 여러가지 성찰'들을 이 공간을 통해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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