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그리고 남은 꿈

깐느(CANNES), 프랑스

by 황사공




2011년 여름, 뜨겁던 프랑스 니스의 해변가에서 혼자 맥주를 먹다가

문득 이 근처에 내가 그리도 꿈꿨던 그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정에도 없었고 가는 방법도 몰랐고 다음 여정을 위한 길을 곧 다시 떠날 예정이었지만

그곳을 꼭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곳에 이렇게 가까이 와 놓고 가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져, 숙소로 돌아가 짐을 후다닥 정리하고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2011년의 나는 깐느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DSCF0713.JPG 깐느 기차역. Gare de Cannes.




영화의 도시 깐느.

이 곳은 내게는 꿈의 도시였다.

영화를 사랑했던 내가 꿈꿀 수 있었던 가장 큰 꿈,

깐느 영화제에 다니는 영화인이 되는 것.



휴가철 끝자락의 깐느는 듣던 대로 화려했지만 너무도 평화로웠다.



명품샵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들,

오래된 역사가 보이는 낡은 극장들,

해변에 들쭉날쭉 줄 서있는 화려한 요트들,

높게 솟아 자란 야자수들,

그리고 건강한 갈색빛의 피부를 자랑하는 해변의 프랑스인들까지.


영화 축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 곳의 공기가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시간에 쫓겨 다시 후다닥 니스로 돌아오면서 깐느의 정경이 담긴 엽서 위에 나에게 보내는 다짐을 적었다.



"다음번엔 꼭 비즈니스를 하러 이 곳으로 돌아오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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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깐느]








2015년 5월.

4년 만에 나는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그것도 비즈니스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대한항공을 타고, 파리에서 환승해 니스 공항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그랬다. 다시 깐느엘 왔다.

2011년 8월에 나 자신에게 다짐했던 꿈이 이뤄졌다.


이 곳에 나는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다시 오게 되었다.




2015년, 제 68회 깐느 국제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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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깐느는 세계 각 국의 영화 관계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펄럭이는 영화 현수막들,

카메라맨들로 에워쌓여 있는 레드카펫,

나비넥타이를 매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도 들리는 해안가의 요트들,

한평 남짓한 영화 부스들에서 흘러오는 세계 각 국의 영화 홍보 영상들 그리고 내가 아는 얼굴들까지.



그랬다. 정말 꿈만 같이 나는 내가 5년 전 나에게 했던 약속대로 이 화려한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에는 많은 과정이 있었다.


2011년, 긴 여행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운 좋은 기회가 내 앞에 놓였고, 나는 선택했다.

그 시작이 지금껏 흘러 흘러 나를 영화일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고, 배지를 목에 걸고 깐느의 레드카펫을 활보할 수 있도록 나를 이 곳에 데려다 놓았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 일이 이뤄지도록 돕는다는 것을 믿는다.


흔해빠진 삶의 조언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났던 것 같다.

물론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게 너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꾸고 있는 꿈을 향해 내 삶의 모든 방향을 스스로 조정해 놓는 성격이라 노력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들은 우주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고맙게도 나의 우주는 늘 내 편이었다.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큰 문제 중 하나가 꿈이 없다는 것이라고 쉽게들 말을 한다. 하지만 정해진 과정에 따라 짧게는 24년, 길게는 30년을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꿈을 갖고 또 꿈을 이뤄가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시험을 잘 치는 법과 좋은 대학에 가는 법,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법만을 온 사회가 알려주고 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누군가만 해 내는 보기 드문 경험이라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한다. 꿈은 특별한 것도 아니고 거창할 필요도 없는데 꾸지도 않고 포기해 버린다. 무엇인가가 잘못돼도 많이 잘못된 것 같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꿈을 가진 아이였다. 다행히 공부도 곧잘 했고 하고 싶던 것들에 대한 부모님의 지원도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 - 영화를 찍는 고등학교에 가겠다, 영화 관련 학과를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 - 등의 결정에서는 강력한 벽에 부딪혀야만 했었다.


그저 아무 문제없이 대학교 4년을 끝마치고 취직해서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부모님이 바라는 전부였다. 착한 딸이었던 나는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어 그것들을 해내기 위한 시간과 노력들을 보여 드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아직 시도하지 못한 많은 꿈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나만의 힘으로 내가 원하는 삶에 다가갈 수 있는 사소한 노력을 기울였다. 포기하지 않았고 체념하지 않았다. 조금씩 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뤄지게 될 것이라 믿었다.



혼자 깨우쳐야 했던 그 많은 경험들, 쉬이 비난받았던 꿈들, 그리고 좌절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그래도 기특하게도 나의 꿈을 잘 지켜냈고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꿈의 도시인 깐느에서, 영화를 향했던 지난 15여 년 간의 꿈이 이뤄진 것을 느꼈다. 잘했어.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엄격하셨던 아버지에게 한껏 자랑하고 싶었다.


"이것 봐요! 내가 언젠가는 영화하는 사람 될 거라고 했었죠? 나 깐느로 출장 왔어요! "


남들이 뭐래도 상관없다.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고 또 이뤄 낸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내 꿈은 이렇게 이뤄졌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처음 참석해 본 깐느 영화제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하지만 더디게 흘렀다.

그리고 초반의 행복함과 기쁨이 비즈니스 속으로 사라진 갑작스러운 시간 속에서 나는 공허함을 느꼈다.


꿈을 이룬다는 것에서 온 기쁨은 잠시.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제 다시 무엇을 꿈꾸어야 할까?



꿈을 이룬다는 것은 물론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하지만 나 같은 목표지향적인 성향의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꿈을 이룬 것이 기쁨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고민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 도시에서 온 몸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극한 허무에 빠져버렸다.


뜨겁게 열정적으로 해 왔던 일들에 대한 의욕도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참 우습다. '깐느라는 도시에 일을 하러 간다는 것' 이 내 삶에서 차지했던 크기가 얼마였었던 건지 인지하고 있지도 못했는데, 내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기분이 든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지나왔던 힘들었던 수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생각보다도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버텨내 오면서 어쩌면 너무도 지쳐버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꿈의 도시였던 이 곳에서 이제 이만하면 됐어.라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영화일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영화를 사랑한다. 뜨거운 영화판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꾸만 자꾸만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바쁜 와중에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쓰려 노력한다.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과 대면하는 글 쓰는 시간들이라 믿는다. 오랜 시간 써 왔고 지금도 써 왔고 앞으로도 아마 쓸 것이다.


아마 나의 다음 꿈음 글 쓰는 것과 관련된 무엇이 될 것 같다. 아직은 어렴풋한 방향만 설정되어 있는 작은 시작이지만 이렇게 10년이, 아니 어쩌면 20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하나의 꿈을 이뤘구나.. 라며 잘했다고 나를 칭찬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저마다의 꿈마다 그 크기가 다르다.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고 꿈에 따라서도 다르다. 개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꿈의 크기는 가늠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꿈은 그 크기보다 존재 자체가 소중하다.


'영화'의 꿈을 이뤄버린 내가 또다시 작게 '글'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작은 꿈이 이런저런 일들로 힘겨워하는 내 심장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나는 꿈을 보고 사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너무도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도 꿈을 심어주고 싶다.

모두가 꿈꾸길,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않길, 내 꿈이 무엇이고 그 꿈이 이뤄졌다고 소리치는 날이 오길.



그렇게 나는 오늘도 꿈꾸며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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