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라산, 제주도

by 황사공



2016년 12월 17일, 제주를 찾았다.


익숙한 제주였지만 이번에는 꼭 한라산을 오르리라 다짐한 채 처음으로 홀로 이 곳을 찾았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서는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온전히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혹 너무 많은 것들은 남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꼭 한라산을 홀로 오르고 싶었다.


엊그제 제주에는 첫눈이 왔다고 한다.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이내 폭설로 인한 입산 통제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비행기와 숙박은 이미 예약이 된 상태였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일단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실시간으로 한라산 국립공원을 새로고침 하며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운 좋았던 그 전날의 바다, 도두항.


한라산 말고는 제주의 어떤 곳도 가고 싶지 않았던 나의 염원이 통했던 걸까, 극적으로 등산을 가려던 날 새벽에 입산 통제가 풀렸다. 그렇게 나는 갓 내린 눈이 뽀드득 거리는 한라산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서는 관음사, 성판악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관음사 코스는 폭설로 인한 통제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른 새벽부터 택시를 타고 성판악 입구로 향했다.


성판악 코스는 한라산 등산 코스 중 가장 길고 지루한 코스로 길이 9.6km,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코스이다. 물론 편도로.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서는 정상 직전에 있는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12시 전에 도착을 해야만 한다. 쉼 없이 7.3km를 오른다고 해도 9시에는 출발을 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7.3km를 쉼 없이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맘 편히 오르기 위해 그냥 오전 7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성판악 코스 안내표지판. 무시무시한 9.6km



12월의 한라산은 눈물이 날 만큼 추웠다. 눈이 와서 더 그랬겠지만 바늘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온 얼굴을 찔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이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새하얀 풍경들이었던 것 같다.


낯선 풍경, 낯선 바람, 낯선 적막함 그리고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낯선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한라산을 오르고 있는 오늘의 나는 그저 낯선 이방인 일 뿐이었고, 그 기분이 정말 좋았다.



해를 처음 만나는 눈들. 고개를 빼꼼히 들고 있는 듯.



오늘은 15년간 가장 친한 친구 리스트에 올라 있던 한 친구의 결혼식이다. 결혼식은 부산이었고 지금 나는 제주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꿈꿔왔던 날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너도 나도 서로 노력할 마음이 없나 보다. 각자 잘 살자. "

".. 그래. "


우리의 마지막 카톡이다. 그토록 가까웠던 15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허물어졌고, 우린 서로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지도 않은 채 각자의 삶만 선택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친구에겐 그 나름의 삶과 이유가, 나에겐 또 나 나름의 삶과 이유가 있는 거니까. 함께해 온 시간이 긴 만큼 쌓여온 감정의 응어리도 깊었다. 조금씩 조금씩 쌓여온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가 어떤 일을 계기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 속에서 우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을 흘려보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도, 그녀도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먼저 관계를 돌이킬 노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그 친구에 대한 관대함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조금 슬퍼할 순 있겠지. 오랜 우정을 놓쳐버린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너무 곧으면 부러지기 쉽다는데..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6년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한 해이다. 어딘가가 나름 중요한 많은 일들을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 탓에 다른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삶이 참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나만의 것이 아닌 이유들로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뀐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조카의 탄생, 가족의 입원 등과 같은 일들은 정말 나의 의지와는 정말 무관하게 내 삶의 우선순위의 최상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카와 보낸 열댓 번의 주말 동안 나는 천사를 만나는 행복을 느꼈지만, 천사보다 덜 소중한 것들이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남의 일인 것처럼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바빴던 직장생활도 한몫했다. 승진과 동시에 밀어닥친 과중한 업무와 책임감에 짓눌린 채 숨조차 간신히 쉬는 듯한 일상에서 업무보다 덜 소중한 것들을 나는 또 놓쳐버리고 말았다.


바쁜 것이 나쁜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성가시게 만드는 데 있다는 그 말이 정말 딱 맞다. 너무 바빠 나 하나 챙기기가 버거웠던 지난 한 해 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린 대부분의 소중한 것들은 성가신 무엇인가로 전락해 버렸다.


내 인생의 길에도 표지를 좀 남겨주련?


혼자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쩐지 아주 오래간만에 혼자 걷는 시간을 만든 것 같아 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부산스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세상에는 내 발소리와 새소리, 눈 녹는 소리 들로 가득 차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귀가 멍해질 만큼의 낯선 적막함이 나를 감싼다. 산의 기운이다. 이런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 산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쉼 없이 올랐더니 두 시간 만에 진달래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직 10시도 안된 이른 시간이다. 남들은 다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지만 아직 출출하지 않아 내려오는 길에 먹기로 하고 잠시 쉰 다음 다시 출발했다.



진달래 휴게소부터 백록담까지는 가파른 경사로 이어져 있었다. 난이도 A 구간. 좁고 가파른 구간을 지나니 계단이 나왔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 무시무시한 계단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라온 다른 사람들이 이 곳에서 다 한눈에 보인다. 이 계단에서 다들 죽을 고비를 맛보지 싶다.



[천국의 계단]의 모티브는 아닐까.. ?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올랐다. 아니 빨리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이미 세 시간의 오르막을 경험한 허벅지와 종아리는 터질 듯 팽팽했다.


오른쪽으로는 생명줄과 같은 가이드 밧줄을 잡고, 왼쪽으론 환상적으로 펼쳐진 운해를 감상했다. 그 힘든 순간을 아무것도 아닌 듯 만드는 파랗고 하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눈과 자연이 합심해서 만든 조각상들도 훌륭했다. 저마다의 모양과 결이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섯 계단 오르고 풍경 한번 감상하고, 또 다섯 계단 오르고 사진 한번 찍고, 그렇게 한 시간쯤 계단을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1950m, 드디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정상에 도착했다. 산소가 부족하거나 고산병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고산병이라니... 정상을 향해 오르는 내내 펼쳐져 있던 풍경으로 워밍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의 위용은 정말 엄청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백록담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 그리고 드 넓게 펼쳐진 운해와 푸른 하늘의 수평선.. 지평선.. 아니 운평선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경계와 빛과 선명함은 환상 그 자체였다. 이래서 다들 한라산, 한라산 하나보다.


이토록 맑고 화창한 백록담을 만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했다. 거기에 흰 눈으로 덮인 모습이라니!


첫 한라산 등반에 이런 행운을 주신 하늘에 감사를!



흰 사슴이 물을 먹고 간다는 백록담 (白鹿潭) , 명승 제 90호 -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오늘의 백록담이 더 황홀했던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이는 맑은 하늘과 하얀 눈 그리고 구름으로 덮인 세상에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드넓게 펼쳐지고 살아 움직이는 운해를 직접 만날 줄이야.


느리게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구름들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무엇인가가 꿈틀 거리며 움직이는 것만 같다.



바다의 파도와 구름의 파도, 많이 닮았지만 정말 다르다. 바람에 따라 움직임이 정해지는 바다의 파도와 다르게 이리저리, 뭉쳐졌다 흩어졌다 하며 예측할 수없이 움직이는 구름의 파도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내가 서 있는 여기가 대체 어딘가 싶은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조용히. 느리게. 하지만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제 갈길 묵묵히 가는 구름들.

영하의 날씨와 산 정상의 칼바람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을 것만 같은 풍경이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야 할 방향과 속도로 나만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알려주려고 이 추운 날 이 높은 곳으로 나를 오르게 했나 보다. 내가 놓친 많은 것들에 아쉬워하는 요즘을 보내던 나에게 눈물 나게 감동스러운 순간이다.



다 괜찮다고, 이미 흘러간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그저 너의 속도대로 너의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라고. 그러면 인생은 어디론가 가게 되어있다고. 그렇게 위로를 보내주는 듯하다.


이제 매년 눈 소식을 들으면 눈 덮인 한라산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내게 위안의 공간으로 남게 된 그 높고 차가운 그곳을 말이다.


운해. 자연의 또 다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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