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Jun 18. 2021

행복한 여행이길 바라

유산 휴가 5일의 기록

얼마 만에 아무 생각 없이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몇 달 전 충동적으로 서점에서 데려와 놓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펼쳐보지도 않았던 책이 왜 지금에서야 갑자기 눈에 들어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은 어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치유 문학, 나중은 한 문학 작가께서 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푸는 글을, 정말이지 그 어떤 잡념 없이 읽어 내려갔다.


5일간의 유산 휴가다. 5일이면 워킹 데이 일주일이다. 평소 같았으면 회사에서 연락은 안 올까, 쌓인 메일들은 또 언제 처리하지, 하는 조바심으로 온전히 쉬지 못했을 텐데, 이번엔 겪은 일이 일인지라 회사 생각이 정말 하나도 들지 않았다. 같은 거래선을 함께 담당하는 현채인들에게는 일주일간 병가를 쓰게 되었다고, 정말 급한 건이 아니면 다음 주로 미뤄달라고 이야기해둔 터였다. 처음 겪는 형태의 슬픔을 맛보고 나니 회사 일이야 정말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며칠 전부터 막상 방송할 땐 안 봤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보기 시작했다. 1화부터 소아과 병동의 아이 하나가 죽음을 맞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의 다양한 죽음에 맞닥뜨리는데, 갑자기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아이가 성적을 비관해 자살을 할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소아과 병동에서만 살다가 결국 완치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데. 그런 수많은 죽음 중에서 그나마, 그나마 가장 마음이 덜 아픈 건 내가 겪은 이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참 못된 생각이지만...


시간이 참 잘 간다. 휴가라는 이름에 맞게 별달리 하는 것 없이 그냥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며칠을 알람이 깨기도 전에 눈을 떴다. 한의원에서 내게 만성 피로가 심하다는 말을 하던데, 피곤하면 잠이 더 잘 와야 하는 건데. 모처럼의 휴가인데 퍼질러 자질 못하고. 낮에 잘 지내다가도 밤에 자려고 불을 끄면 눈물이 난다.


한 나흘 간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이 등장하면 "저게 가능한가?" 삐딱하게만 생각했던 벌을 받는 건지. 내가 주연인 드라마에서 나는 온갖 청승은 다 떨었다. 어떻게든 위로를 받고 싶어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그런데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이 사실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어쩌면 병원에서 처음 상황을 알고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주수엔 이런 일 잘 안 생기는데.."


그냥 다 거짓말 같았다.


주말엔 기분 전환을 위해 집 근처 공원에 산책을 나갔는데, 수많은 아가들과 임산부들을 보니 기분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오빠 손을 잡고 "오빠, 우리도 저렇게 귀여운 아가 낳자."라고 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내 주변에도 참 많은 임산부가 있었고, 작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있었다. 내심 위로받고 싶어서 개인 인스타에 글을 썼지만 적게든 많게든 그 글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유산'이라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의 이야기는 브런치의 이 작은 비밀스러운 공간에만 털어놓을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간 써 내려간 글들을 훑어보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무가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딱 그즈음 나는 중국 영상물 리뷰를 재개했고 그 주에 참 많은 리뷰를 썼다는 것. 선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글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져 글을 쓴 것인지. 그저 이 소름 끼치는 우연에 놀랐을 뿐.


월요일에는 손목 발목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의원에 갔다. 바우처 남은 돈도 있고 하니 약도 지어먹고 침도 좀 맞으려고. 우습게도 유산도 출산의 일종이라고 손목이 시리고 예전에 다쳤던 발목이 갑자기 아프고, 몸은 팅팅 부었다. 아가를 낳은 것과 증상이 비슷한데 손에 잡히는 아가는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한의원에서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문진을 하는데, 생각해보니 산부인과와 오빠 말고 누군가에게 나의 유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게 처음이었다. 눈물이 날 뻔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잘 넘겼다. 하필이면 여성 전문 한의원이라 임산부나 임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오갔다. 비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유산이란 단어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요일에는 임신 8주 정도에 들어두었던 태아 보험을 해지했다. 가입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청약철회의 방식으로 해지할 수 있다고 했다. 심장 소리도 듣고 아기도 주수에 맞게 잘 크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안심하고 가입했던 것인데 이런 결말을 맺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가입 선물로 오기로 한 젖병 소독기는 보내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래저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보험 설계사분께 카톡을 남겼다. 그분에겐 사실 실적 하나가 사라지는 것임에도 꽤나 따뜻한 답을 들었다. 다행이다.


이틀에 걸쳐 '임신'이라는 키워드로 나와 묶였던 매듭들을 차근차근 제거하고 나니 수요일엔 거짓말 같이 맑은 하늘이 찾아왔다. 남편이 '나무가 엄마 그만 슬퍼하라고 예쁜 하늘 줬나 보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마스크 쓴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한의원 근처에서 산책을 하는데 아기 고래를 닮은 조그만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헤엄치고 있는 아기 고래 구름을 보며 우리 나무도 하늘에서 행복한 비행을 하고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생겼다. 그때부터 더 이상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나오진 않았다. 밤에 갑자기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누구의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런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준 위로인 것을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잘 알고 있지만,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슬픔들이 빚어낸 순간들을 직면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첫걸음이라는 사실도. 큰 상실을 겪은 이에게 진짜 위로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음은 물론이다.


나무가 보내준 아기 고래 구름과 푸르디푸르렀던 하늘을 생각하며,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제 다시 앞으로 나아가 보기로 한다. 유산 휴가 5일이 마음에 딱지가 앉게 하는 데는 꽤나 도움이 되었던  같다. 나무야, 봄이 있는 그곳에서의 여행이 행복하길 바랄게. 따뜻한 날에 다시 돌아와 . 기다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