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Jul 28. 2022

만삭 임산부의 루틴

그냥, 가끔 이런 글도

아침 7시 30분 알람에 눈을 뜬다. 8시까지 남편과 함께 침대에서 뒤척이다 화장실에 간다. 혈압을 잰 뒤 꼬리뼈 스트레칭을 하고 체중을 잰다. 측정한 혈압과 체중은 식탁 옆에 둔 달력 오늘 날짜 밑에 적어둔다. 임신중독증은 갑자기 오고 혈압이 그 시작이라고 하여 가정용 혈압계를 산 뒤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습관이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그와 내가 각자 오후에 먹을 영양제를 약통에 담는다. 8시 20분 정도 되면 마치 군대에 있는 것처럼 신속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을 배웅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쉬다가 아침을 차려 먹는다. 요즘 아침에 주로 먹는 건 에어 프라이기에 구운 식빵과 버터, 잼. 그릭요거트와 그래놀라까지 먹어주고 나면 우유 한 컵으로 마무리한다.


아침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빨래가 필요하면 빨래를 한다. 세탁기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 챙겨보던 드라마를 한두 화 보다가 11시 30분쯤 되면 점심 먹을 준비를 한다. 요즘 배달료가 너무 비싸 식재료를 사놓고 점심을 해 먹곤 하는데, 점심에 뭘 해먹을지가 은근히 고민거리다. 볶음밥이나 계란후라이, 두부부침 같은 것이 혼자 먹기 간편하고 쉽다.


점심을 먹고 영양제 몇 알을 먹고 나면 또다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이 시간쯤 되면 집안이 더워져서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다. 샤워를 하고 상쾌해진 몸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도 있고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외출이 하고 싶어지면 한 3시쯤 시내버스를 타고 영통으로 나간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빌려온다. 평일의 도서관은 본래 한산해야 하지만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열람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어 은근히 번잡하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남편에게 저녁을 무얼 먹을지 물어보고 준비한다. 여섯 시가 넘어 남편이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저녁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남편과 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걸어서 집 근처 산책을 한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또 20분 정도 유튜브를 보며 임산부를 위한 운동과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 좌욕과 샤워를 하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다 10시쯤 오렌지 주스에 철분제를 먹고 양치 및 가글 후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정말 별거 안 하는 것 같은 요즘 나의 루틴이다. 7월 초부터 연차 소진 및 출산휴가에 돌입하면서 이런 루틴이 만들어졌다. 초반에는 회사일로 바빠 해두지 못한 아기 옷 세탁이나 아기용품 정리, 집 청소 등으로 나름대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웬만한 건 거의 끝났고 수술 날짜도 잡혀서 미리 진통이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이런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성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정말이지 '무엇도 하지 않는' 루틴한 생활을 해본 적이 있나 싶다. 옛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빈 시간에 뭔가를 끼워 넣으려고 처절하게 궁리했었는데, 지금은 배가 너무 나와 어디 멀리까지 움직이기도 힘들고 무리하면 갑자기 아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은 가장 좋은 태교"라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다.


'몸이 무겁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그 어떤 속박도 없는 이 휴직 기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그다지 유쾌하지 않긴 하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하루에 2만 보, 심지어 3만 보도 너끈히 걸었던 내가 이제는 6천 보만 걸어도 힘이 들어 쉬어 가야 하고, 대중교통을 탈 때면 임산부석이 비어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이것이 만삭 임산부의 현실이다. 아이와 함께 살기 전 마지막 자유를 화려하게 누려보겠다는 나의 휴직 전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썩 나쁘지도 않다. 정말이지 언제 또 이렇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볼 수 있을까? 물론 이따금 '아기가 태어나면 정말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지만, 그 외에 하루에 가장 큰 고민이 '밥 뭐 해 먹지'인 이런 하루, 정말 나쁘지 않다. 한 번도 누려본 적은 없지만 전업주부의 삶이 이런 것 아닐까. 물론 전업도 전업의 고민이 있겠지만, 회사 다닐 땐 회사일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나로서는 정말 '마음 편히' 쉬고 있는 요즘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런 삶도 끝이겠지. 하지만 그만큼 또 다른 형태의 즐거움과 보람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호두야, 우리 만나기로 한 날까지 뱃속에서 편안히 있으렴. 먼저 나오지 말고 ... ㅎㅎ

작가의 이전글 행복한 여행이길 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