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최고 화제작
중국드라마를 한동안 너무 안 봐서, 언제부터 안봤나 보니 대략 2023년부터 화제작을 안 찾아봤더라고. 그래서 또우빤에서 2023년 중국드라마 랭킹을 찾아서 1위인 이 드라마부터 보기로 했는데, 이 드라마. 대단하다. 평점 9.4, 2023년 1등 작품인 것도 모자라서 또우빤 전체에서 평점 4위를 기록했다(2026년 1월 기준). 이 말인즉슨, 중국인들이 뽑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나온 드라마 중 4번째로 좋은 드라마라는 뜻. 1위가 예전에 리뷰했던 <무림외전(武林外传)>, 3위가 <서유기(西游记)>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고 생각해도 된다.
총 12화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드라마. 다만 11화가 100분 정도 되고 한 회당 60분 넘는 길이이니 우리나라 일반적인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평점도 좋은데 길이도 양심적이라 거의 일주일 정도만에 다 본 것 같다. 사실 후반부는 호흡이 빨라서 육퇴하고 저녁 자유시간을 대부분 할애해서 보기도 했다.
감독은 이전에 리뷰한 <은비적각락(隐秘的角落)>을 연출한 신솽(辛爽) 감독. 작품이 많지 않은데 타율이 좋다. <은비적각락>, 이 드라마 모두 또우빤에서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음악인 출신이라는데, 그래서 그런가 작품 속 삽입곡들이 아주 적절하다. <은비적각락> 때 배우 친하오(秦昊)를 좋게 봤는지, 이 드라마에도 신솽이 그를 주연으로 데려왔는데, 전작에서는 대머리였다면 여기서는 인슐린 맞는 당뇨병 걸린 중년 남성을 만들어놨다. 실제로 이 배역을 위해 살을 찌우고 배불뚝이 분장까지 했다는데.. 더 대단한건 다음 작품을 바로 들어가야해서 촬영 끝나자마자 바로 식단으로 10kg를 뺐다고.. 이러니 데려다 쓰지....
드라마는 동북지방에 있는 화린(桦林)이라는 한 중소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이곳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찝찝하게 마무리된 상태에서 현재를 맞이한 주인공들이 다시 과거 사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결국 미스테리를 풀어낸다는 내용. 이 이야기를 크게 세가지 시점을 왔다갔다 하면서 전개한다. 토막살인 사건이 나기 전, 난 후, 그리고 현재. 시점이 계속 바껴서 극 초반엔 좀 정신없다. 하지만 전환되는 시점에 영상적인 처리가 아주 깔끔하고 교묘한데다 (예를 들면 거울보고 있다가 과거의 거울 보는 장면으로 연결된다든지), 전환 자체도 동일한 키워드를 가진 과거나 현재의 어떤 시점으로 연결되게 만들어놔서 아주 잘 쓴 추리소설 한 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용만 들으면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드라마일 것 같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가족, 친구, 사랑, 운명을 그리는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작품이다. 살인사건은 그저 그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소재로 쓰였을 뿐.. 여기서 드라마 속 대사를 인용해본다.
'우리는 일평생 우리 몸 주변에 동그라미가 하나 그려져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 동그라미 안에서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계속 사는거야. 누구도 왜인지 묻지 않고, 누구도 그 동그라미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안하지. 심지어 그 동그라미 선을 밟는 것조차 무서워해. (我们这辈子就觉得我们那个这个身上啊, 那是有个圈的, 我们就在那儿按部就班地在圈里那么走着, 也没人问为啥, 也没人到圈外溜达过, 就连踩了个线都害怕)'
드라마속 메이쑤美素의 말처럼, 드라마속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동그라미, 즉 운명(命)을 거역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경기가 좋지 않고 공장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니 그 안에서 딴주머니를 찰 고민을 하고,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일하다가 아들에게 자기 일을 물려줄 궁리를 하고. 그들에게 그 일들은 체제에 순응하며 주어진 인생을 살 방편이며,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공장의 물건을 빼돌려 딴주머니를 차는 이들을 저지하던 정의로운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고,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 일자리를 받을 수 있는데 시인의 꿈을 놓지 못한 아들은 죽음을 맞고,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던 션모(沈墨)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난생처음 복권 1등에 당첨된 공뱌오(龚彪)는 생각지 못한 결말을 맞는다. 자신에게 둘려진 동그라미를 벗어나려 하니 시련이 오는 것이다.
주인공은 말한다. '젊을 때는 운명을 믿질 않았는데, 이 나이 되어서 보니 운명이 진짜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드라마는 우리에게 '뒤돌아보지 말고 앞을 봐(别回首,往前看)'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아들을 잃고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에게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그 아이를 구하고 키워내려고 결국 또 살아간다는 내용은 그저 그게 주인공의 운명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죽은 아들이 원하던 시인의 꿈을 이뤄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미술가의 꿈을 가진 이 양아들은 열심히 서포트해주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래, 이 생에 여한이 없게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재밌었다. 이 정도 짜임새 있고 떡밥회수 잘하는 드라마 별로 없지. 왜 높은 점수 받았는지 알 것 같다, 가 처음 나의 감상이었다. 그 마음 그대로 위챗 펑요췐에 리뷰를 썼다. 하지만... (여기서부턴 솔직한 이야기, 위챗엔 못올리겠다)
드라마의 작품성을 떠나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는 메시지를 주는 건 체제순응적인 메시지를 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잔인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통과했고, 실제로 대중들에게 그 메시지가 먹혔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라, 그게 너의 운명이고, 운명을 바꾸려 하면 안 된다, 바꾸려 하다가는 죽는다, 잡혀간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 주는 것 같아서 다 보고 생각해보니 좀 많이 찝찝했다. 이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중국인만이 아닐테다)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진짜 속내인 것 같아서.
덧1) 배경이 동북지방이다. 동북지방은 겨울이 길~다. 하얼빈의 영하 몇십도가 거짓이 아니듯. 이 드라마의 계절적 배경은 가을이다. 가을은 짧~다. 그 짧~은 가을에 이 모든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래서 제목처럼 아주~ 긴 가을이 된다. 제목은 그런 의미가 있다.
덧2) 배경이 동북지방이다. 동북지방은 동북지방의 또 특유의 발음과 사투리들이 있다. 혀도 엄청 굴리고, 억양도 특이하다. 보통 동북지방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은 좀 암울하다. 예전에 리뷰했던 <무증지죄(无证之罪)>나 <백일염화(白日焰火)>가 그랬듯이. 신솽 감독은 그런 동북지방의 이미지를 좀 바꾸고 싶었단다. 그래서 계절적 배경도 가을, 영상도 좀 따뜻한 느낌이 들게 만들고, 가족간 친구간 그야말로 热情한 동북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근데 벌어지는건 토막살인..^^;;;;;) 남방 사람들과는 또 다른 동북 사람들의 성격적 특징에 주목하며 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