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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Sep 12. 2020

합격 통보는 늘 짜릿해?

합격, 후련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인생 첫 합격 통보는 언제였을까? 고등학교를 선발제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아마 고등학교 합격 때가 아닌가 싶지만 그리 큰 인상은 없다. 그 다음으로 받았던 합격 통보는 대학 정시 합격 통보인데, 이건 좀 많이 기뻤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회사생활 7년차인 지금의 나는 인생에서 어느 대학으로 진학하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의 나에게는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서 가장 명확하게 놓여 있는 목표가 대학 진학 뿐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연락처도 모르는 선배가 '새내기'였던 나에게 축하한다고 전화를 걸었던 일도 생각난다. 대학 입학 후 외부 장학생 선발, 교환학생 선발 등 크고 작은 합격 통보를 거쳐 회사 합격 통보까지, 인생에서 내게 '들어오세요'라고 문을 열어주며 환영해준 일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낀다. 모든 합격 통보는 늘 짜릿했다. 하지만 이 합격 통보는 달랐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면접이 끝나고 내게 남은 것은 결과 통보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별 일이 없었다면 아마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합격만 하면 당장 12월 중순부터 파견 전 교육을 받기 위해 현업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니 눈앞에 '방 학'이라는 두 글자가 어른거리며 누가 뭐라고 해도 실없는 웃음이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해 11월은 그때까지의 회사 생활 중 가장 암흑기였다. (아, 물론 복귀 후 지금 나의 회사 생활도 만만치 않게 암흑이지만 이는 논외로 한다.) 고객 내방과 각종 이슈는 끊이지 않았고 면접을 봤던 일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내가 면접을 봤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주변 분들이 정기적으로 내게 일깨워주었다. 파견을 나가게 되면 부서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 자명했기에 종종, 아니 꽤 자주 결과를 물어오셨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과 발표는 계속 미뤄졌고 합격 여부에 대한 소문만이 무성한 채 12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문자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18년 12월 7일, '예비 선발자'로 합격됨을 안내 받았다

'예비 선발자'로 '확정'되었다는 다소 애매한 메시지. '예비'라는 말은 얼마나 애매한가? 대학 입시나 아파트 청약 처럼 예비 번호를 받은 것인지, 결과를 받고 나서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와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았는지 후에 따로 통지가 왔다.


지역전문가 최종 선발은 파견 전 어학 시험에서 파견 자격에 맞는 어학 등급을 취득해야 하고, 신체 검사 등에서 결격 사유가 없어야 결정되는 것으로, 지금 '예비 선발자'가 되신 것이 결국 회사 면접은 통과하셨다는 뜻입니다.


꼭 파견되고 싶다는 마음이 통했던 걸까. 한동안 머릿속이 멍했다. 우선 가족에게 소식을 알렸고 추천서를 써주셨던 그룹장님 및 파트장님, 감사한 분들께 바로 인사를 전했다. 센스있게 금요일 저녁에 발표가 난 덕에,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남편과 축배를 기울였다. 여기까지는 마냥 기분 좋고 짜릿하기만 했다. 합격 통보라는 것을 받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어서였을까? 누군가에게 인정 받고 허락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즐겁기만 했던 주말을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발표가 다소 미뤄진 까닭에 파견 전 교육 입과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2~3일 남짓 되는 시간 동안 거래선 인수인계 자료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담당자들에게 충분히 설명도 해주어야 하고, 동시에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작별의 인사도 해야 했다. 당시 내 손에는 대형 거래선 세 곳이 들려 있었고, 어느 거래선 하나 쉬운 곳이 없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如释重负) 마음이 후련하고 상쾌해야 했을텐데 성질이 그리 모질지 못해 새롭게 거래선을 맡을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인생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양가감정이 교차하는 경험은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어서 들어오세요~' 하는데 '들어가도 되나?' 하며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이는 형국이었다. 지역전문가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선배는 내게 '그 미안한 마음 얼마 못 가 없어질 거야~'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틀렸다. 파견이 끝나고 복귀할 때까지도 그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미안해 해서 내색들은 못하셨겠지만 그때 부서는 이미 인력이 없어 많이 힘든 상황이었고, 감사한 마음만큼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새롭게 거래선을 담당할 분들이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교육을 받고 돌아오신 분들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나와 똑같은 내적 갈등을 겪으며 한국을 떠났을 분들이었기에 오히려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덜 미안하게끔 만들어 주셨다. 다행이었다.


그룹장님께서는 '회복 탄력성' 이야기를 하셨다. 물론 큰 거래선 여러 개를 맡고 있던 부하 직원이 한 순간에 자리를 비우게 된다는 점이 당장은 그룹에 큰 타격을 주겠지만, 우리 그룹이 그 정도 회복 탄력성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만약 이 정도도 극복하지 못할 부서였다면 그건 그룹장인 당신께서 잘못 관리한 책임이니 내가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그룹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가지고 가되 미안한 마음은 오래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의 내적 갈등을 그대로 꿰뚫어보고 해주신 조언이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파견이 결정되기까지 도와주시고 지지해주셨던 선후배분들께 인사를 전했다. 인사 메일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편지를 인용하며 지역전문가 파견 동안 마음이 자라 돌아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업무 메일로 딱딱한 말만 쓰다가 몽글몽글 말랑말랑한 글로 마음을 전하려니 영 쑥스러웠지만 이 때 만큼은 회사인으로서의 가면을 잠시 버리고 나다운 글로 인사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보내주신 편지를 지금도 힘이 들면 가끔 펼쳐보곤 합니다. 그 편지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자라고 있단다. 몸도 마음도. 특히 마음은 선생님과 같은 어른들도 자란단다. 특히 그 자라는 것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단다."

중화영업에서 보낸 4년의 시간은 매 순간이 제 마음의 Capa를 시험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왜 내 마음은 이 정도 일에 흔들리는 걸까, 왜 그릇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자책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 덕분에 콩알만했던 제 마음도 그 사이에 많이 자라났습니다.

타지에서 보낼 1년의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도 많이 보고, 느끼면서 마음의 Capa를 더 늘리고, 복귀해서 지금보다 더 중화영업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이 더 큰 사람이 되어 다시 인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 멀리서라도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서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고 회사를 나왔다. 짐을 싸서 퇴근을 하려니 '퇴사를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역전문가 파견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1년 후 돌아오면 회사는 어떤 모습일까? 파견되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무엇 하나 답이 보이는 질문은 없었다. 발을 디뎌 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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