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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Sep 19. 2020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한국어만 안 쓰시면 됩니다

회사를 떠났다고 그 즉시 상해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예비' 합격자였고, '정식' 합격자가 되려면 들어야 할 교육과 통과해야 할 관문이 꽤 많았다. 우선 이 프로그램을 보내주는 후원자 격인 회사의 교육을 받아야 했고, 단기간에 현지어 패치를 해내기 위한 어학 교육을 들어야 했으며, 생면부지의 땅에 도착해 밥은 굶지 않을 정도의 언어 구사를 할 수 있는지를 어학 시험 성적을 통해 증명해야 했고, 현지에서 갑자기 건강상의 문제로 파견 취소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건강검진을 통해 증명해야 했다. 역시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본격적인 어학 교육을 받기 전, 우선 각 회사에서 선발된 '예비' 합격자들이 모여 집합교육을 듣게 되었다. 교육 내용이야 사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회사에서 당신들을 파견시켜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녀온 사람들의 소감은 어떤지, 1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은지 등 요약하면 '놀지 말고 배워 오세요' 이 아홉 글자를 이삼일에 걸쳐 전달하는 시간이었다. 2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서 듣는 교육이었기 때문에 사실 강사가 얼마나 전달을 잘하는지보다 청중이 얼마나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강의 중에 전달받은 내용은 많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말은 한마디뿐이다. '2019년 이 한 해가, 스스로를 많이 칭찬하고 격려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십수 년 전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파견을 나갔다 오신 선배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외국에서 가족과 떨어진 채로 1년을 살아야 하는 불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현업을 떠나 지낼 수 있다는 기대감.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이 두 가지의 감정이 엿보였다. 굳이 한 가지 감정을 더 꼽자면 함께 파견을 나가게 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는데, 함께 파견될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 그 사연들이 생각보다 다양했다. 내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인 이 프로그램이 어떤 이에게는 부서에서 돌아가며 부여하는 흔하디 흔한 기회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주재원을 나가 고생하기 전 위로의 선물로 이 기회를 받은 이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본인이 파견을 희망했던 국가로 갈 수 없게 되어 울상이 되기도 했다. 그 배경은 모두 달랐지만 한 배를 탄 이상, 받아야 하는 교육은 같았다.



일종의 정신 교육이 끝난 후 하게 된 일은 진짜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이 예비 합격생들에게 주입해야 할 지식으로 선택한 것은 '현지어'였다. 사실 회사가 지역전문가 프로그램의 성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이고 타인에게 보여주기 쉬운 숫자가 바로 '어학 성적의 변화'다. 물론 지금도 나는 이 프로그램을 다녀온 사람이 현지어 등급이 몇 등급 올랐는지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 생각일 뿐이고, 회사 입장에서는 '가시적'이고 '직관적'이고 '수치화'된 지표가 필요했고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지표는 어학 등급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파견 전 가장 기본 등급은 취득해야지만 파견이 확정될 수 있었고, 파견 중에 한 번, 복귀 후에 또 한 번, 이렇게 총 세 번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어학 성적이 발전, 최 소 한 퇴보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야 페널티를 받지 않고 프로그램을 마칠 수 있었다.


현지에 도착해서 적어도 공항에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어학 능력을 배양하는 것, 이것이 당장 파견을 3개월 앞에 둔 예비 합격생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모든 후보자들은 10주간의 외국어 수업을 듣고, 마지막 10주차에 시험에 응시해 그간 공부한 결과를 증명해내야 했다. 대학 때 전공이 중어중문학이고 현업에서도 계속 중국어를 쓰고 있었던 내게 있어서는 전혀 어렵지 않은 목표였다. (오히려 누군가는 내게 꼼수를 써서 첫 시험을 일부러 못 치라고 하기도 했다. 첫 시험부터 좋은 성적이 나오는 순간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에서도 그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한 부담감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앞서 말했듯 모든 후보자들의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었고 해당 언어의 기본 자음, 모음, 발음 체계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0주라는 시간 동안 기초가 전혀 없는 사람의 말문이 트일 수 있을지 다들 반신반의했다. 교육 입과 첫날, 모두의 의문이 풀렸다.


이 곳의 이름은 '외국어 생활관'이었다. 입과생들이 꼭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은 딱 하나, '어떤 경우에도 한국어를 쓰지 말 것'. 그리고 이 유일무이한 규칙이 바로 단기간 내에 어학 실력을 키워주는 비결이었다. 레벨 테스트를 통해 수준별 학급에 배정된 수강생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등 각 영역별 수업을 듣게 되는데, 수업 중은 물론 쉬는 시간까지도 한국어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의사표현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 싶지만 다 방법이 있었다. 분명 처음엔 침묵만이 감돌던 초급반 교실도 어느 순간부터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조나 문법이 맞든 틀리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한국어를 쓸 수 없는 언어 환경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물론 듣고 보는 모든 것이 현지어인 해당 지역에서의 생활보다야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지의 환경과 유사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이 과정의 특징이었다.


'별로 자극도 안 되고, 재미없지?' 10주간 중국어만 써야 하는 곳에서 교육을 듣고 있다고 하니 많은 지인들이 이렇게 물어왔다. 하지만 굳이 어느 쪽인지 말하라면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현지에서 보낸 1년도 소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파견 나가기 전 용인 산속에 갇혀서 중국어만 쓰며 지낸 그 시간이 가장 즐겁지 않았나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어에만 매진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전무했는데 일단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 가장 좋았고, 초급반, 중급반 학생들이 틀리더라도 한 마디라도 더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도 되고 긍정적인 자극도 많이 받았다. 또 곧 중국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 한 구석에 있다는 건 금상첨화였다.


전공자가 이 10주간 무엇을 공부했는지 누가 묻는다면, '뉘앙스'와 '중국적인 사고'를 공부했다고 하겠다. 당시 내 중국어 구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뉘앙스의 부재'였다. 물론 전공자인데다 고객과도 계속 중국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의사 전달 차원에서의 언어 구사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중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중국인이 자주 쓰는 단어, 문형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거래선 중 대만계 거래선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 습관에 녹아 있는 대만의 흔적들도 단점으로 작용했다. 대만과 대륙은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 구조, 발음 등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아무래도 1년간 살게 될 곳은 대륙이다 보니 이 또한 고쳐야 했다. (내 대만 친구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테지만, 그저 곧 살게 될 환경이 대륙이라는 점, 어학시험의 평가자가 대륙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중국인 선생님과의 수업, 수업을 마치고 여유 시간에 틈틈이 본 중국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 중국인이 말하는 뉘앙스, 어감을 익혔다. 또 역사적 사실이나 현대 사회 모순을 다룬 드라마로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배웠다. 간혹 어색한 어휘나 대만식 말투를 사용해 말하곤 했던 나도 10주가 지난 후에는 한국어 필터를 덜 거치고 직접 중국어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주간 틈틈이 봤던 드라마의 회차를 다 더해 보니 288회 분량이다. 한 회당 1시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0주간의 과정이었으니 1주일에 28.8시간, 주말까지 포함하여 하루 4시간을 드라마 보는 데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에 8시간 이상의 중국어 수업을 들었으니, 적어도 12시간은 중국어만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무언가가 방해하지 않는 환경에서 오롯이 중국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도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 같은 반 급우들이 "드라마 보는 것 진짜 좋아하는구나~" 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달랐다. 내가 <별에서 온 그대>, <김비서는 왜 그럴까> 같은 한국의 인기 드라마를 하나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90년대 경인방송(iTV)에서 방영해주던 <황제의 딸(还珠格格)>, <꽃보다 남자(流星花园, 물론 대만판)>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본 중국 드라마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 감상이 어학 공부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라시를 덕질했던 고등학교 때, <고쿠센>과 <미나미의 연인>, <마왕> 등 일본 드라마로 무장했던 그때, 내 일본어 실력이 가장 좋았으니 말이다.


10주간 틈틈히 봤던 중국드라마들. 중국 드라마/영화 감상은 지금까지도 좋은 취미로 남아있다.


위 포스터의 드라마는 내가 중국 드라마 세계에 입문하게 된 10주간의 시청 목록이다. 중국 현대사회의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현대극 <환러쏭(欢乐颂) 1, 2>, <따화홍냥(大话红娘)>을 보았고,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셩쓰씨엔(生死线)> 및 <따쟝따허(大江大河)>를 보았으며, 비록 가상의 역사이긴 하나 고전극의 말투나 어휘를 익히고 겸사겸사 잘생긴 배우도 보기 위해 (그렇다. 역시 이런 동력이 없으면 공부에 빠져들기 힘들다.) <랑야방(琅琊榜)>을 보았다. 타임 슬립을 주제로 하거나 무협, 판타지를 다룬 작품은 되도록 멀리 했다. 드라마를 보는 본 목적은 학습을 위한 것이니만큼 학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콘텐츠, 사실이나 현실 사회와 조금이나마 연관이 되어 있는 작품을 보려고 노력했다.


각설하고, 어학 공부 외에도, 10주의 시간 동안 회사에서 따로 내 준 숙제들도 꽤 있었다. 파견 후 1년간 어떻게 경비를 사용할지에 대한 경비 계획이라든가, 그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떤 일정으로 지역 연구를 수행할지에 대한 계획, 또 법인 실습을 하면서 어떤 주제의 프로젝트를 수행할지에 대한 계획 등등 현지에 가서 허송세월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한 각종 숙제들이 주어졌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즐거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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