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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Sep 05. 2020

공격포인트는 다른 곳에

지역전문가 면접, 그 날

우여곡절 끝에 지원서를 낸 후, 1차 합격자 발표는 생각보다 빨리 났다. 이후 전해 듣기로는 지원자의 약 절반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복병은 바로 며칠 후 봐야 하는 면접이었다. 지원서를 바탕으로 면접관 분들 앞에서 말로만 때우는 면접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이 면접은 달랐다. 지역전문가 지원 동기, 그리고 그 면접 때 면접관 분들께 보여주기 위한 PPT 작성도 필요했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입사 때부터 꿈꿔 왔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여느 때보다 훨씬 동기부여가 되었다.



면접 통보를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면접 경험이 있는 분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이었다. 면접 진행 방식, 면접장의 분위기, 오고 갔던 질문들, 그에 대한 대답 등 경험담은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개중에는 본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거시적인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했던 분도 계셨는데, 좀 죄송하기는 했지만 그분에게도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사실 지원서 작성 때부터 이 분이 나를 제일 많이 도와주셨는데 결국은 회사에서 다른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善有善报)"는 말이 딱 맞는 듯하다.


두 번째로 한 일은, 내가 파견되고자 하는 지역인 중국에 대해서 심도 있게 분석한 책을 속독하는 것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의 전공은 중어중문학이었고, 교환학생 경험도 있고, 한 때는 국제대학원에서 중국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꿈도 키웠던 나지만,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내게 그저 '거래선이 위치한 나라', '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거래선에 치일 때는 중국이, 또 나의 전공이 원망스러울 때도 적지 않았고, 중국의 트렌드를 읽고 공부를 해보려고 해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면접 준비 과정에서 왜 중국에 가야 하는지를 적어보려고 하니 중국의 '지금'을 몰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키워드 중심으로 속독을 진행했다.


세 번째로, 면접에서 사용할 PPT 얼개를 짜고 내용을 작성하였다. PPT의 양식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면접 공고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간략하게 나와 있었다. 우선 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을 빈 종이에 적어두고,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지 브레인스토밍 해 보았다. 그리고 PPT 장표에 내용을 적어내려 갔다. 최종적으로 6장의 장표에 아래 내용이 담겼다.


회사에서 꼭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던 필수 내용에 살을 붙여 짰던 얼개


마지막으로 예상 질문 목록을 만들고 어떤 식으로 답변할지 간단히 적어보았다. 사실 면접 준비 과정 중 이 부분에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 준비해 간 PPT의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아무래도 면접관 분들도 사람인지라 현장에서 나오는 돌발 질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예상했던 질문들은 아래와 같다.


지역전문가 파견을 나가기엔 너무 이른 것 같지 않나?

중국에서 문화충격을 받았거나 중화지역에서 Business할 때 실수했던 경험은?

중화지역 영업담당으로서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중국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중국어 전공에 급수도 높고 중화 영업도 이미 하고 있는데 꼭 지역전문가 파견이 되어야 하는가?

현업에서 지금 빠지게 될 경우 부서에 타격은 없는가?

현지에 가게 되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의 회사 생활에서 현지 경험이 꼭 필요한가?




대망의 면접날이 다가왔다. 팀장/그룹장으로 구성된 면접관들 앞에서 파견 나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최대한 진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우선 준비한 PPT를 바탕으로 지원 동기 및 파견 후 계획 등을 어필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는 입사 자기소개서에 있던 문구 한 단락을 인용하여 지역전문가 과정을 입사 지원할 무렵부터 꿈꿔왔음을 설명했다. 지원자 중 입사지원서를 가지고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인지 이 부분에서 면접관 분들의 눈이 빛났던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질의응답 시간. 당시 시사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었던 미중 무역분쟁(中美贸易战)에 대한 질문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지를 묻고 싶으셨던 것 같다. 거시적인 주제로 질문이 들어왔을 때 전문적이고 정확한 답을 하기가 어렵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출발해 답을 찾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내 거래선들이 보인 변화의 양상을 중심으로 현황을 설명하고, 결말이 어떨지 간단한 추측을 덧붙였다. 물론 많은 면접들이 그러하듯 답이 맞는지 틀린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면접 당시 질문을 던지신 그분도 이 무역분쟁의 결말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


다소 긴장됐지만 대체로 예상했던 범위 내의 질문이 오갔기 때문에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마음을 담아 답변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진짜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영업팀 보스들의 질문이 다 끝나고 난 뒤 인사팀의 질문이 시작되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범주의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결혼 및 가족과 이 프로그램을 연관지은 질문이었다.


지역전문가 지원에 대해 가족과 상의는 되었나?
배우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지역전문가는 1년이지만 주재원을 나가게 되면 4~5년인데, 그런 것까지 다 준비가 되어 있나?
배우자는 그렇다 치고, 시댁도 동의하나?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역전문가라는 이 프로그램은 회사에서 직원을 믿고 1년간 해외 각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방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현업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서 현지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많은 직원들이 그 기회를 잡고 싶어 한다. 다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듯 이 제도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바로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지에 있는 시간 동안 더 집중해서 알차게 생활하게끔 하기 위해 가족의 방문은 제한되어 있다. 또 당사자도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본인은 자유로워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가족의 입장에서는 생이별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회사 입장에서는 지역전문가를 선발할 때 기혼자보다는 미혼자를 선발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 된다. 그렇기에 기혼자인 내가 지역전문가에 지원하는 순간 이러한 공격포인트를 몸에 달고 전장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원서를 쓰기 전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족과 상의를 해왔다. 아빠는 늘 내 편이기에 두 손 들고 찬성이었고, 남편도 내가 얼마나 이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았기에 군말 없이 동의했다(내가 파견된 후 그가 겪었던 외로움은 논외로 하고). 시댁 입장에서는 아들을 혼자 한국에 남기고 중국으로 떠나겠다는 며느리의 결정이 독단적이라고 생각되었을 법도 하지만 시부모님 두 분 다 인자하고 좋은 분들이셨기에 동의해주심은 물론이고 혼자 잘 생활할 수 있을지를 도리어 걱정해주셨다. 그렇기에 결혼이나 가족에 대해 질문을 받더라도 나는 충분히 인사팀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지역전문가는 1년 이별이지만 주재원이 되면 4~5년인데'라는 이야기는 다소 씁쓸했다. 질문의 의도는 뻔했다. '당신도 남편도 둘 다 직장이 있는데, 당신이 주재원으로 파견 나가게 되어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고, 그러면 단신 부임으로 4~5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할 수도 있는데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마침 그즈음 아이 둘을 데리고 단신 부임으로 주재를 나가신 여자 차장님 얘기도 들렸고, 여성 직원이 주재원이 되려면 차라리 부양가족이 없는 경우에 더 가점이 있다는 '썰'도 있었다. 지역전문가 면접에 주재원 얘기는 왜 물어보지? 내가 '남성' 지원자라면 이러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은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했지만, 면접장을 나오면서 이런 씁쓸한 생각은 마음속에 계속 머물렀다.


어찌 됐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인사대천명(人事而待天明)!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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