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잠 - 29 로마 last, last, last..
꼭 28번의 잠, 로마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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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 외출 마지막인 산책 마지막의 교통패스 마지막의 노을
로마에서의 모든 것이
last last last
Ultimo Ultimo Ultimo
하루 전은 불안해서 이삼일 전부터 짐 정리를 시작했더니
마지막 외출이 가볍다
애용하던 교통수단이 트램 3번에서 버스 87번으로 바뀌고부터
나보나 광장에 자주 가게 된다 아침부터 광장의 대리석 의자에 앉아있다
따뜻해진 날씨 중에선 오늘은 조금 쌀쌀한 편에 속하지만 (해가 구름에 가려서다)
마지막 밤까지 길 위에 있기 위해 체력을 안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앉아 있기 좋은 장소에 오면 오래 머물다 일어선다
익숙해지니 떠나야 하는 불가항력의 이별 미스터리를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길을 걷고 걷다가 천사의 성 근처 벤치가 있는 작은 공터에서
다시 앉는다 구름이 흩어지며 숨었던 해가 나와 한결 따뜻해졌다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못 알아듣는 가사의 생소한 음악을
듣는 것도 좋다 아마도 내 시선에 보이는 저쪽 회전목마가 있는 어디에서
틀어놓은 아무에게나 들려주는 음악 같다
바로 옆 벤치에는 젊은 이탈리아 청년이 책을 읽고 있다
이따금 시선이 가는 것은 젊은, 때문이 아니라 책, 이라는 게 중요하고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책을 들고 다니며 되는대로 아무데서나
책 읽기에 열중하는 모습은 유럽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 중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담는 풍경 사진이 대부분인
나의 엄청난 물량의 사진첩에는 책 읽는 사람 사진은 많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에는 돌로 된 벤치가 차갑다
그래도 꽤 오래 햇볕을 머금어 두었다 일어나 다시 걸었을 때에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성 베드로 성당과 천사의 성을 정성껏 바라보았고
이제 매트로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겠다고 역에 온 것은
지중해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러 갈 생각에서였다 리도 디 오스티아로 가기 위해
그런데 지하철이 내가 내려야 할 역을 2 정거장 남겨놓고
완전히 서버렸다 이방인은 왜인지 모를 영문과 41분 뒤에 다음 열차가 있다는
사실만 앞에 놓인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모르는 그 역의 바깥으로 나갔다 지난번에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렸던
역이었다는 기억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곧 나의 선택에 대해
셀프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아무 정보 없이 들어선 동네는 주택이 모여 있는 외곽의 한적한 곳
그런 느낌이었는데 띄엄띄엄 나타나는 단정한 주택들과 촌스러운 담장들
개 짖는 소리와 나무 타는 냄새 걸으며 오감으로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이
따뜻하고 좋았다 이 동네의 햇살이 더 포근하고 따사롭게 느껴지는 것은
오후로 접어든 시간 때문일 수도 있지만 평화롭고 정겨운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로마에 다시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면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권하고 싶다
교통패스로 이동이 가능한 로마의 외곽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주택가에서 머물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시내 구경을 다니는 그런
일상과 유사한 시간을 지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만 해도 좋았던 나의 이런 마음은 마지막 도시의 숙소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해가 기울기 전에 어서 바다로 갈까 하던 생각을 바꿨다
나의 모든 잠과 모든 걸음은 로마에 대해서였으니
마지막 하루도 로마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사정없이 끌리고 있으니
나는 이것만큼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따라야겠다
시간은 pm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서둘러 로마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고 해가 져버릴까
애를 태우며 짧은 거리조차 걷지 않고 버스를 탔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오렌지 나무의 정원에 다시 왔다
진실의 입 근처 호기심이 발견한 로마를 한눈에 조망하기 최적인 장소
좋은 건 나만 아는 건 아니라서 그날도 오늘도 해질 녘의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담에 기대거나 올라앉아 누가 봐도 멋진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 동안의 도시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오늘은 보내고 싶지 않은 해가 이울고
검은 배경 위로 불빛들이 수도 없이 그려질 때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품어준 사랑하는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가슴속 깊이 머금어 삼킨다
뜨라스떼베레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새로운 길과 풍경을 쫓지만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편에 속하는 식사 철학(?)때문에
마지막 저녁식사는 결국 까를로멘타에서 마무리한다
아저씨가 추천해 준 식당도 있었지만 먹어본 맛에 마지막 표를 행사하며
오늘은 코스가 아닌 단품으로
까르보나라 파스타와 나폴리 피자(정어리가 들어간) 그리고 대범하게
작은 사이즈의 맥주를 주문했다 독일에서 친구와 즐겨 마셨던 맥주를
혼자가 된 한참 만에 지금 처음 마신다 이탈리아 맥주의 기대감 때문은 아니고
어차피 술을 잘 알지도 잘 마시지도 못하며 그저 마지막이라는 수식을
이 저녁 식사에 굳이 갖다 붙이는 식으로
까르보나라는 면이 많이 퍼졌지만 맛있어서 괜찮았고
나폴리 피자는 문제의 염장된 정어리가 너무 짜서 한 조각에 실패와 포기를 선언했지만
맥주 두 모금에 벌써 달아오른 얼굴로 계산을 하고 나와서는
자꾸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걸 참지 못한다
이번엔 날씨 때문이 아니고 알코올 때문인 게 분명한데
마지막이 슬프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집으로 돌아가기엔 미련이 남아 강을 따라 걷고 귀갓길의 트램에선
일찌감치 내려 집으로의 도착을 유보하기 위해 아주 천천히 터벅터벅 걷는데도
붙잡아달라는 찌질한 마음보다 잘 지냈다는 홀가분한 마음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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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이 떠날 준비를 마친 방 안에서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워 정적의 공기 속을 초점 없는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그만, 속으로 가만히 인사한다
이 침대 이 방 이 집 이 거리 이 도시
마지막 밤 마지막 잠
부오나노떼
Buona Notte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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