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 가을 시작

시골살이-15

by 윤에이치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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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골살이는

여름 끝에 시작되었다

8월이었으니 시기상으로

그렇지만

올여름은 질기고 지독했다

10월의 추석이 지나가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러니까

지금쯤 가을이 본격적인 느낌

한바탕의 긴 여름을

낯선 곳에서 잘도 보냈다

더운 날씨야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제주에서도 여기 시골집에서도

다를 바 없었지만 이곳엔 그걸

뛰어넘는 바라왔던 설렘이 있었다

여기, 이렇게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몰라도 좋아요

이름만이 꼭 당신은 아니니까요

그냥 거기 아름다움으로 있어 줘요

어쩌면 너도

뜨거운 공기를 가를 날갯짓이 버거워

콘크리트 뜨거움 위에서라도

쉬엄 쉬고 싶었겠지

형광등 불빛마저 무더위를 지피는

여름밤에는 모두가 은은하게

가늘고 얕은 빛과 숨만 내뱉으며

겨우 견딜 수밖에

옥수수는 뜨거운 여름을 먹고도

잘도 자란다

더위에 강한 식물조차 말라가는

폭염 속에서도 쑤욱 키를 키웠구나

맥없이 지쳐가는 하루하루

때로는 소리 없는 작은

응원이 필요해

여름이 통과한 거울 속 계절은

파랗고 푸르러

거긴 좀 시원합니까?

계절이 바뀌는 날들에 내리는

비는 반가웠는데

도무지 물러가지 않는 늦여름 비가

축축하게 엉겨 붙어 인내심 테스트 중

비 온 후 갬

애니메이션 구름이 그렇고 그런 날에

한 줌 위로가 된다

향을 머금은 찻잎은 지긋이 오래

냉침한 게 더 향긋하고

뜨거운 건 다 미워질 땐 요리보다

단출한 요깃거리가 좋다

장화를 신지 않고 수시로

잡초를 제거하려고 텃밭에

디딤돌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는데

어떻게든 공간을 밀치고 굉장한

번식력을 자랑질하는 거

정말 얄밉지

별을 올려다볼까 해서

늦은 저녁 마당에 나갔다가 어느

포근한 창이 따스하고 다정해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게

나의 창이라 더 기분이 좋다

신기하지 않아

그래도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꺾이지 않고 꽃을 피우고야 마는

강하고 아름다운 힘과 기운이

우리도 힘내라고 활짝

응원하는 것 같잖아

봄과 닮은 새싹이

봄의 이란성 계절인 가을에게

어서 돋아나라고 재촉한다

시골도 도시와 다르지 않게

다른 형태의 소음이 끊이지 않아

심란한 기분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땐

좋아하는 음악으로 처진 기운을

끌어올리는 거다 지지직 오래된

잡음이 일렉기타 소리와 어우러지는

비가 이미 시작됐다면

외출할 생각을 하지 않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시작된 비라면

얘기가 다르다

시골집 창과 닮았지만 다른

와이드 하게 펼쳐지는 풍경 때문에

그래도 햇빛이 모든 그림자를

빠짐없이 만들어내는

볕 좋은 툇마루에서의 여유가

집순이에게는 제일 좋다

가을이 익어 갈수록

반지르르 윤이 나고 속이 실해지는

사랑스러움

가을이 깊숙해질수록

또렷해지는 빛깔과 몰랑해지는

어여쁨

강한 것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빚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갑옷을 뚫고 나와

무엇과도 같지 않은 자신으로

세상에 당당하게 피어나는 것

여름 한철 배불리 먹고도 남아

냉동실에 얼려둔 무화과를

공기가 달라진 선선한 아침

꿀만 넣어 졸였는데

잼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그래도 청은 아닌 걸쭉한

무화과잼이 완성됐다 모양새는

이래도 맛이 없을 수는 없다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틀림없이 가을이 온 겁니다

낮의 햇빛이 따끔거려도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리듬감 있게

쓰다듬어 주는 바람이 느껴진다면요

가을 산책길 낯선 풍경 속에서

그리운 풍경을 보았네

육지 시골 여기는 황금빛으로 물드는데

거기 섬 제주의 어느 마을길로

순간이동한 줄 알았네

그리운 그곳에도 가을이 왔습니까

당신들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에도

가을이 물들고 있습니까

색을 바꾸고

익어가는 것들을 떨구어 내는

가을 추, 를 품고 있는 계절은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추수와 추락의 돌림 노래를 부른다

내가 사랑하는 포로로마노

회색빛 몰락의 부서짐 속에서 피어난

생명의 색을 일상에서 목격할 때

우리는 결국 멀어도 똑같은 생을

부여받은 지구인 동족이구나 싶은

미천한 것의 우주적 생각

나의 텃밭에

감자꽃과 사과나무꽃이 피었다

꽃이 떨어지고 잎이 바스러지고

열매를 맺기 위해

새로운 때를 기꺼이 맞이하는 자세

그래 그런 때라는 거지

결국 다음 계절의 순서가 되었고

또 다른 계절이 반복될 게 분명하다는 건

바뀌지 않는 삶의 이치라는 것이지

조금 더 힘들게 견뎌내야 했지만

여름은 결국 물러섰고 가을은 이미

시.작. 되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계속 가야 한다는 것

선택의 권리에 대한 행복의 의무를

권리와 의무라는 단어는

떼어내 버리고

계절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된다는 것

그러다 보면 나 또한

고요히 어느 곳에 뿌리내려

피고 지고 있겠지


+

[시즌제 예고]

가을 끝

겨울 시작

겨울 끝

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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