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돋는 순간이 있지요, 오늘이 그렇고요
시골살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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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아 세탁을 하고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는다 가을 속에 있다 두려울 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기운이 곧 이 사랑스러운 오후를 집어삼켜 버릴까 봐
여름이 옷자락을 질질 끌면서 퇴장을 유예하더니 뒤늦게 가을이 등장하자마자 이제는 성질 급한 다음 계절이 출발선상에서 최고기록을 세우려는 포부로 뜀박질할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쩔 수 없나 가려는 것은 붙잡을 수 없고 오려는 것은 막을 수 없으니 지켜보는 것은 능동적인 것과는 반대편에 있다 그러니까 상심하기보다는 소중히 여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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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건 추워서 소름 돋은 게 아니라 책을 읽다 소름이 돋았다는 것이다 오늘 읽고 있던 책은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였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 여느 때처럼 그 구절이 있는 문단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그게 무슨 소름을 부를 일이겠나 소름 돋은 것은 휴대전화의 사진첩에서 1년 전 스토리 알림이 뜨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때문이었다
(우선은 오늘 좋았던 구절은 이것이다)
대체로 이 알림을 확인하는 것은 그날의 기분에 따른다 추억 삼아 보거나 무시하거나 그 말인즉슨 오늘도 무시하고 넘길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무 의도 없이 어떤 생각도 없이 오늘은 그냥 알림 창을 눌렀고 1년 전 사진들이 자동재생됐다 그리고 그 사진들 중에는 소름을 유발한 문제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의 어느 페이지 어느 문단 어느 구절을 찍어둔 것이었다
(다음은 1년 전에 좋았던 구절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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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필연으로 느끼는 것은 내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기억하지 못하고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나쳐간 우연들이 수십 수만 가지일 텐데 마음의 갈망이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로 등장하니 우연이 아닌 것 같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믿지 않겠다고 다부지게 외면하던 나도 제주 일 년과 시골 일 년을 살아보자고 결정했을 때 우연처럼 살 곳이 나타났고 그걸 필연이라 여기며 생각이던 계획을 현실로 강행했다
만약 내 속의 갈망이 크지 않아 행동하지 않고 지나가게 두었다면 그 기회들은 우연조차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우연을 필연으로 가장한 운명에 요동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운명처럼 나타난 우연을 필연으로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나라는 사람이 염세적이고 나를 포함한 사람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할까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서 이 또한 장담할 수는 없다 왜?
오늘 같은 우연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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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점점 더 짧아지는 것에는 필연이라 느낀다 조금 무거운 얘기지만 인간이 싸질러놓은 것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지 않나 그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집에서 나는 이 슬픈 사실에 대해 조금 위로받는다
가을이라 부르는 계절이 오자 하늘은 높고 높은 하늘에 구름은 크고 크고 큰 구름이 등 떠미는 기운 센 바람에 흐르고 흐르고 기운이 넘친 바람은 나뭇잎마저 사정없이 떨궈버리고 길 위에 흩뿌려진 낙엽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산책길을 걷는 사람은 무언지 모를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다
추수가 한창인데 낙엽을 쓸어 담기는커녕 부지런한 옛 어르신들이 손가락질하던 한량처럼 낙엽 밟는 소리에 그저 기분이 좋은 것은 그야말로 진짜 한량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한량이라고 하여 제 처지 제 책임 제 의무 모른 채 낙엽만 밟고 책만 읽는 것은 아니라서 그것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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