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시간이 도시보다 짧아서요, 그리운 건 아니고요
시골살이-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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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운동 겸 산책 겸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 5시도 되지 않아 산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순식간에 공기가 싸늘해졌다 짧은 귀갓길에 손이 시리고 으슬으슬 떨려 뛰는 듯 걸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 바닷가 마을에 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산세가 멋진 시골집에서는 추운 계절에 소중한 하루치 해를 너무도 일찍 잃어버린다
해가 난 자리에 일찌감치 달이 들어섰다 달은 예쁜데 등골이 서늘하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달의 등장이 한기를 서둘러 몰고 와 그의 멋진 조각 얼굴이 조금 덜 반갑다 미안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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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서의 해 뜨는 시간도 해 질 녘과 다르지 않다 7시 즈음이 일출 시간이라면 날은 서서히 밝아지는데 공기는 여전히 싸늘하고 7시 반이 지나서야 산을 열심히 넘어오는 해의 머리를 겨우 만난다 툇마루에 볕이 들기까지는 일출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 순간이 어찌나 반갑고 애타게 기다려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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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시골집에서 새벽을 맞으며 여실히 느낀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도시에 비해 추운 계절이 한 발 앞서 오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계절 평균 기온을 따진다면 이미 영하를 찍은 서울에서의 가을에 비해 남쪽의 훨씬 높고 따뜻한 영상의 기온은 상대가 되지 않아 이런 말들이 괜히 엄살처럼 생각될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일교차가 크다는 것이고 체감상의 추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2주 전엔 서리도 내렸고 아침 일찍 텃밭에 루꼴라를 뜯으러 나갔을 적엔 손이 얼어 아주 혼났다 밤새 이슬 맞은 싱그러운 루꼴라는 늦가을 새벽 공기의 반격에도 어떻게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도 새순이 올라오고 있어 한 달째 빠짐없이 샐러드를 먹는 행복한 아침을 기꺼이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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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길로 조금 새 보자면 나의 신선한 아침 밥상을 채워주고 있는 루꼴라는 독특한 향과 맛에 쓰임새도 좋아서 샐러드볼 안에서도 새우오일파스타 옆에서도 닭가슴살 샌드위치 위에서도 푸릇푸릇 싱그럽다
아쉽게도 텃밭에 함께 입주했던 바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바질이 유독 추위에 약한 건지 텃밭에서 시름시름 앓아 다시 아이스박스 작은 분을 만들어 분갈이를 했는데 바질잎의 색은 돌아왔지만 크기가 영 커지지 않고 성장도 무척 더뎌졌다 낮에는 햇빛에 내어두고 물도 듬뿍 주면서 보살피고 있지만 이제 막바지를 향해가는 바질의 생애에 무조건적인 응원과 기대를 쏟아붓는 것은 멈춰야 할 것 같다 그동안도 멋진 빛깔과 향긋한 내음으로 충분한 기쁨을 주었으므로
소중한 한 잎 한 잎이 욕심 많은 입 속에서 얼마나 존재감을 뿜어내었던지 요거트 위에서 상큼했고 그릭요거트와 고구마와 바질의 삼합(?)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오랜 시간 띄워둔 바질잎이 청량하게 만든 물은 숲 속 샘물 같았고 스파게티 위에는 서른 장도 넘게 올려 먹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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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푸른 잎들의 가을 수확도 마무리되어 간다 생채소를 좋아하는 내겐 아쉬울 뿐이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으니 다만 햇빛은 포기하지 못하겠다 남향의 툇마루에 한기 대신 그득한 따스함을 쏟아내려 줄 햇빛이 짧게 머물다 가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온화한 마음으로 듬뿍 베풀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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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해가 뜨는 하늘을 확인하곤 한다 여차하여 구름이 하늘을 장악한 날은 그때부터 벌써 오들오들 떨린다 가을 구름이 멋지지만 너무 많이 떼 지어 몰려다니면 소중한 햇빛이 기를 쓰지 못하니까 그러면 나도 종일 기를 쓰지 못하니까
대신 이런 날도 있었다 요 며칠 해 뜰 녘에 구름이 가득했는데 그 덕에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멋진 하늘이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마당에 나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면서도 마음은 안절부절 어서어서 구름이 흘러가길 바랐는데 다행히 곧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더군다나 해가 드는 낮의 마당은 봄날처럼 따뜻해서 계절을 거스르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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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딱 이 정도면 좋겠다 찰나에 구름이 펼쳐진 멋진 하늘을 보여주고 유유히 흘러 물러나는 기가 막힌 흐름으로 추위에 대한 두려움을 어루어 주면 좋겠다 그러면 하루 종일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뭐든 이것저것 해 보고 싶어져 하루가 충만해질 것 같으니까 언급했다시피 나는 날씨에 좌지우지되는 쉬운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나를 상대로 제발 밀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배신하지 않고 시골집을 곁에 두고 도시를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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