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관계는 아직 3단계고요

시골살이-20

by 윤에이치제이


나는 선천적으로는 극으로 치닫는 내향인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건 어릴 때의 지배적인 성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학습이 가능하고 자기 통제와 조절에 능숙해서 부단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벽을 깨고 나올 수 있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게 됐으니까 그러니까 내 경우도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함과 동시에 잘 훈련되고 통제된 외향인의 탈을 쓴 내향인으로 지낼 수 있게 됐다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방법을 터득한 내향인이 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아니 마음먹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자동화된 프로그램이 입력된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것처럼 기계적으로 모드를 바꿀 수 있는 아주 잘 작동되는 사회화된 내향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낯선 사람을 만난다면 반나절 신나게 떠들고 즐길 수 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유연하고 재기 발랄하게 내향인이 아닌 척 잘 지내다 올 수 있다 그깟 기를 좀 넘치게 빼앗기고 나면 그래서 초주검 상태가 되어 남몰래 도망치듯 귀가히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건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회복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게 나에게는 뭐가 그리 득이 되는 일일까 심신이 망가지는 속도를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따라잡지 못하는데 그래서 서서히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되어가는데 대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는 순간 한 사람에게 할당된 우주적 에너지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다면 직업의 특성상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분야의 수백 명의 사람들과 교류해야 했던 시절에 이미 나는 90%의 에너지가 고갈돼 더 이상은 외부에 나눌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 겨우 남은 10%마저 빼앗기듯 나눌 기운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이 대목에서 서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럼 앞으로는 내 남은 인생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겠냐는 슬픔에 관한 서러움


그래서 지금은 다시 철저히 내향인으로 살고 싶어 졌고 그렇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건 그게 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긴 대로 살아야 가장 자연스럽고 탈도 없는 법이지 않나 그럼에도 바로 지금 언제라도 툭 치면 반응하는 오뚝이처럼 나는 외향인인 척할 수 있다 그저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기 때문이고 온전히 내가 선택한 후반전이다



그래서요 이곳이라고 다르지 않지요 아마 오해를 받고 있을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싹싹하다는 말도 듣고요 씩씩하고 명랑해 보이기도 하지만요 심지어 수다스럽기까지 한 건 낯선 사람과 대면한다면 침묵과 고요의 어색한 벽을 깨고 말말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기도 하지요 나에 대한 무의미한 정보를 흘리듯 얘기하는 것도 어쩌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미리 알려 방어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자꾸만 묻지도 않은 내 얘기를 술술 내뱉는 나를 발견한다면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라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구나 사전에 공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연인 같은 특별한 사이가 아닌 단순한 인간관계만 놓고 볼 때 너는 나와 얼마나 친하고 가까운 사이인가에 대해 관계의 정도를 혼자 곱씹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골똘히 집중하고 정리해 보니 내 주관적 기준으로는 친밀함의 단계를 10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아주 단순한 지표만으로 분류했을 때라는 걸 미리 밝히면서


1단계 카페에서 카피 마시기 / 2단계 외부에서 밥 같이 먹기 / 3단계 집에 잠깐 초대해 커피 마시기 / 4단계 간단하고 쉬운 요리 나눠주기 / 5단계 같이 차 타고 가까운데 놀러 가기 / 6단계 정성스레 요리해서 식사 초대하기 / 7단계 천천히 나란히 걸으며 둘이서 오래 산책하기 / 8단계 친한 사람 (상대가 원하면) 서로 공유하기 or 가족들과 안면 (정도) 트기 / 9단계 (지인이든 가족이든) 여럿이 어울려 무언가 같이 하기 / 10단계 비행기 타고 같이 멀리 여행 가기



나는 이런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나에게 얼마큼 친밀한 사람인지 굳이 알고 싶다면 이걸 참고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명심해 주세요 당신이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서 내게 여기까지 밖에 다가오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이런 성향의 사람이라서 이 정도로 밖에는 마음을 쉬이 열지 못해 그런 거라는 걸요 그러니 자책은 제 몫이지 당신 몫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과 내가 다른 사람이구나 그래서 저 사람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이해해 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만약 시간이 걸려도 나와 관계 맺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요 내가 당신에게 그럴 만할 사람이라면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내 주위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많은지는 또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거리를 좁혀 가는 문제는 외부의 도움이 전혀 무용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오롯이 내 내면의 문제고 내 마음의 움직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시에 살고 있건 시골에 살고 있건 장소가 중요치는 않다는 걸 깨닫고 있다 주변에서 노력한다고 해서 순식간에 풀어지고 허물어지는 일이 아닌 것도 오래 빗장을 걸어둬 뻑뻑해진 마음의 문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도 어쩌겠는가 사람이 노력해서 변하는 것도 있지만 기어코 바꾸려 하지 않는 것도 애써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데


(+)

어쩌면 나의 가족 모습이 이럴까


아니면 당신과 내가 모든 단계를 극복한 사이라면 이런 모습일까


그럼에도 뭔가 겁을 먹고 경계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다면 가족이든 친밀한 관계든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게 있고요

함부로 넘어오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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