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렸고요, 재미있는 놀이가 필요해
시골살이-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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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을 이틀 앞두고 제대로 서리가 내렸다 나의 소중한 텃밭 루꼴라도 밤새 혹은 새벽녘에 서리를 맞았다 추위에 연둣빛을 벗고 짙은 초록잎을 입었지마는 하얀 설옷을 껴입은 게 마냥 좋을 리가 없다 따뜻하게 옷을 여러 겹 입고 살피러 다녀온 나도 견디기 힘든 찬 기운이 반가울 리가
찬 서리는 담장 기왓장에도 사과나무 잎에도 어김없이 겨울 예고편 격 입김을 내뿜고 지나갔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얼른 해치우고는 꽁무니를 빼며 달아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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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씨의 계절엔 시골집에서 무얼 하며 보내면 좋을까 궁리하진 않았지만 놀이는 저절로 내 앞에 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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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셜 찾기 놀이
산책을 다니러 온 공원에서는 내 발치에 깎아 만든 듯한 Y자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누군가 새총으로 만들려고 깎아 놓았다가 버린 걸까 저절로 툭 부러진 나뭇가지가 와이, 하고 떨어졌을까
단감나무의 감을 따서 멀쩡한 건 잘 보관해 두고 흠집이 나거나 벌레 먹은 건 미리 깎아두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 단감 하나가 와이, 하고 벌레 먹은 자리를 드러냈다 이 또한 너무 선명해서 감을 다 깎아놓고 별일이다 싶어 웃음이 터졌다
가을이 깊어 갈 즈음엔 단풍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가까운 산에 올랐는데 압도적인 크기로 와이, 하며 뻗은 나뭇가지라 하기도 벅찬 나무의 일부가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와이 Y, 는 나의 성에 쓰이는 영문 이니셜이고 이 모든 와이, 는 길지 않은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어리둥절하면서도 신기한 이 일들이 무료한 일상을 재미지게 만들어 준다 싶으니 사진으로도 추억으로도 담아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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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방출 시키기 놀이
이젠 웬만큼 작은 벌레들은 갑자기 출현해도 쉽게 놀라주지 않아 나의 충실한 뇌와 심장이 반복된 상황에 나를 잘 단련시켜 주었으니까 예전엔 덜컹했던 순간들을 어느새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인간의 훌륭한 적응력으로 시골집의 일상이 제법 잔잔하고 평온해진 거지 하지만
한밤중에 손을 씻으려는 세면대에서 떡하니 자리 잡은 개구리를 마주한다는 건 미처 예상도 훈련도 되지 않은 상황이지 않겠니 그래서 오랜만에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던 밤이었지 자극 없는 내 심장과 내 일상에 짜릿함을 안겨 주려는 새로운 놀이인가 대체 방충망 쳐진 창 하나인 화장실엔 어떻게 들어와 거기 자리를 튼 거니 덕분에 그 밤 최선을 다해 쓸 수 있는 도구들을 총동원해 무사히 개구리를 방출시키느라 진땀 나고 스릴 넘치는 놀이 하나를 해치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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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식 곶감 만들기 놀이
요즘은 곶감도 감말랭이도 최신식으로다가 대형 건조기에서 뚝딱 만들어 낸다면서요 그렇게 하면 색도 모양도 더 이쁘고 시간도 훨씬 단축시킬 수 있다지요 경험 많은 전문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시골집 처마 밑에 넘치는 감 일부를 깎아 널어 두고 딱딱한 감이 제 몸의 수분을 날려버리고 진한 단맛 농축된 곶감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것을 경험 많은 전문가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락가락하는 날씨의 계절 어느 한낮 햇살이 따뜻한 오후에 아주 재미진 놀이를 또 하나 뚝딱 완수했습니다 지금은 툇마루에서 햇빛에 말라가고 바람에 흔들리며 곶감을 꿈꾸는 정체성이 모호해진 미완성의 감을 자주 물끄러미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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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이해 가는 뜨개질 놀이
심심해서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다이소에 갔다가 천 원짜리 뜨개실이 모양도 색도 다양하게 널려 있는 걸 보게 되어서였다 학창 시절 가사 시간에나 최고로 열심히 떴던 그 뜨개질을 한번 해 볼까 찬 기운에 곧잘 두통을 일으키는 머리 위에 쓸 쓰개를 한번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저 한번 시도해 보았던 거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제성이 부여된 어릴 적 배움을 결국 몸이 기억해 내는 거였다 지금은 외우려 해도 쉽지 않은데 학창 시절 배웠던 노래들의 가사는 아직도 잊히지 않고 여전히 흥얼거리는 것처럼
처음 시작하는 방법을 검색해서 한 줄 떠 본 다음에는 겉뜨기 안뜨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신기했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코와 떠보는 대바늘의 손놀림이 점점 익숙해지는 게 말이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에 대해 운운하지만 이럴 땐 주입식 교육의 어떤 지점은 그 공로를 인정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뜨개실 하나에 딱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는 정도로만 뜨개질을 했다 뜨개실 하나 다 뜨는 일은 일도 아니어서 세 번째 뜨개실로 한 뜨개질은 겨우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알겠다 해 지고 추워지면 나가지도 못하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시골집에서 뜨개질은 시간을 보내기 참 좋은 놀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도 완성도 높은 뜨개질 결과물을 자랑하는 이가 제법 많다는 것을 뜨개질이 겨울밤의 모든 시간을 집어삼키면 안 되겠지만 뜨개실 두 개 정도 더 사서 뭘 또 해 볼 생각이다 이것 참 재미있는 놀이이면서도 쏠쏠하게 쓰임새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도 이득이다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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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지치즈 만들기 놀이
치즈는 제일 좋아하는 식재료라서 다양하게 종류별로 사서 냉장고에 쟁여 두고 먹지만 코티지치즈나 리코타치즈는 만들기가 어렵지 않아 집에서 종종 만들어 먹곤 했다 이제 시골집에서는 본격적으로 멸균우유 10팩 사다 두고 샐러드나 커리에 내가 만든 슴슴한 코티지치즈 곁들이려고 작정을 했다 이 또한 나에겐 재미있는 놀이
첫 코티지치즈는 만들어서 이웃과 나눠먹었고 치즈를 만들고 남은 유청은 커리 만들 때 써도 좋아서 따로 담아두었다 예전에 치즈 만들 때보다 좋은 건 하얀 면포를 깨끗이 빨아 우유 냄새 배지 않게 햇빛과 바람에 바싹 말릴 수 있다는 것 파란 하늘 배경으로 펄럭이는 면포와 그걸로 꼭 짜낸 치즈가 뽀얗게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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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전구트리 장식하기 놀이
시골집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짐들 중 꼭 필요하고 부피가 크지 않은 것들로만 1/5 가량을 옮겨왔다 그때 크리스마스 장식 가져오는 걸 깜빡했는데 해서 미니미니한 전구를 급조해 툇마루 창 하나에 장식한 미니멀한 크리스마스트리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게 되기도 했고 시골집은 그야말로 미니멀 라이프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어서 나름대로 미니멀한 전구트리가 꽤나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는 기분은 또 어떨까 12월이 시작되고 보니 두근두근 설레고 반짝반짝 기다려진다
밤에 다시 켜 본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전구트리의 불빛들이 깜깜한 시골집의 밤을 별처럼 총총이 지켜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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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기존의 놀이로 실내나 툇마루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책 읽기와 과자 쟁여놓고 먹기는 여전히 유효하고 산책과 농로 달리기는 추위에 약한 나에게 점점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날씨에 어울리고 계절에 맞는 새로운 놀이가 필요하지만 시골집에서는 신기하게도 애써 찾기보다는 할 거리가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물론 필요에 의해 추운 날씨에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머리 굴려가며 생각해 보고는 있다 시골집에서의 애틋한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부서진 담장 모서리를 돌과 나뭇가지와 널빤지를 쌓아 메꾸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는 서늘한 작은방을 식량창고방으로 정리해 두고 빨랫줄을 만들고 겨울 가지치기를 하면서 소소하게 소일거리들을 하나하나 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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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재밌나요 집에서 복작복작거리는 게 사부작사부작하는 게 재미난 가요 그렇게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스릴 넘치고 액티비티 한 놀이를 해야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놀이를 해야 잘 놀았다 재미나게 지냈다 할 수 있는 건가요 나의 재미를 몽땅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서로의 행복해지는 지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각자의 방식으로 재미나게 잘 살아가면 되는 거지요 내가 재미지고 내가 좋아서 웃음이 나면 그걸로 되는 거지요 신나 죽겠어서 방방 뛰는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고 즐기고 싶지만 철없는 웃음은 삼키고 내적 충만함으로 만족하며 그저 흡족하게 잘 지내면 되는 거지요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나 같은 사람도 지금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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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기 전에는 서리가 내렸고 12월이 되고서는 찬바람이 자주 불어 닥치고 영하의 기온도 찍었다 그리고 첫. 눈. 도. 내렸다 이틀 전이었지 툇마루에서 책을 읽는데 곁눈질로 날리는 먼지가 신경 쓰여 고개를 돌렸더니 눈발이 날리고 있는 게 아니겠나 처음 영하를 찍은 새벽을 한참 지나고 정오도 지난 때였는데 쌓이는 눈은 아니었지만 20여분 정도 눈발이 제법 날렸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 시골집에서 제대로 된 첫눈이 내리는 그 장면이 벌써 기대된다
그러니까요 계절마다 아름답고 행복한 놀이에 나를 초대해 주는 시골집이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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