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계절이라니요, 익어가고 물들고 있는데요
시골살이-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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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빛바랜 계절이라 하지요 가을의 색을 갈색 빛이라고 하지요 브라운이라는 영어 단어도 있고요 고동색이라는 색을 나타내는 이름도 있네요 가을은 왜 그렇게 다 빛바랜 갈색 추억이라고 말해지는 걸까요 부정하진 못할걸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초록을 잃어가는 낙엽만 보아도 마당을 뒹굴어 다니는 바짝 마른 잎사귀만 보아도 알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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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기도 한데요 빨갛게 물들고 노랗게 익어가는 계절이기도 한데요 그러니까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니지요 강렬한 색을 입고 풍성한 수확을 하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빛바랜 계절이라는 수식도 긍정하지만 가을은 익어가고 물드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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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단풍의 아름다움을 점점 보기 힘든 이유는 색색들이 제대로 물들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보았어요 더위는 버티고 추위는 서둘러서 색을 바꿔 입을 시간이 줄어들어서라 하네요 단풍의 절정 시기만 늦춰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점점 단풍의 시간을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네요 이렇게 슬픈 소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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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직은 모든 것이 기운을 잃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제 할 일을 꾸역꾸역 해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게 안쓰러운데 고맙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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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는 나날이 노랗게 익어가고요
잘 보이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아주 작고 귀여운 이파리들도 빨갛게 빨갛게 색을 입습니다
너나없이 노랗게 빨갛게 그라데이션으로 조금씩 초록을 벗어버립니다
집 마당의 사과나무 잎도 빨간 사과색이 되었고요 가을 한낮의 청아한 햇빛을 닮은 꽃도 피웠답니다
꽉 차게 익은 뱀딸기가 유혹하는 새빨간 색은 너무 강렬해서 어질어질하고요 실은 정말로 마당에서 풀숲을 웨이브 추듯 미끄러지는 길고 긴 뱀을 보았거든요 실뱀이 아니라 1미터는 될 것 같았고요 짙은 갈색빛의 튼튼하고 매끄러운 밧줄 같은 자태는 도시 촌것인 나에겐 어마어마했지요 무서워서 비명을 지를 수도 있었는데요 그런데 멀찌감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의 담대한 변화는 나조차도 신기해서요 어이가 없기도 했습니다 이곳 어르신이 그랬습니다 뱀은 먼저 심술궂게 굴지만 않는다면 깨끗하고 무해하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요
어쩌면 우리는 자연에게도 동물에게도 속 좁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만도 모자라서요
여름 내내 담벼락을 순식간에 휘감으며 자라나는 속도에 기가 찼던 덩굴 식물들도 이제는 담장에서 예쁘장합니다
단풍은 멀리 가지 않아도 나의 툇마루에서도 사랑스럽게 물들고 있네요 이제는 꽃이 사라진 툇마루에서 아주 빨갛고 소중한 꽃처럼 물들어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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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만 나가도 좋은데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멀리 산책을 나갔다가 가볍게 뛰어 보기도 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문장이 유행처럼 말해지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덜 말해진다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과도 같은 문장이어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한나절 가을 빛깔들을 눈으로 꼬박꼬박 담아 마음에 차곡차곡 심어둔다 그리워질 때면 언제든 새싹처럼 꽃처럼 열매처럼 피어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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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가을이라는 세월을 만나 물들고 익어간다 나도 물들어간다 혹은 익어가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을을 만났을 때 제 계절에 도착했을 때 색을 잘 입을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차하여 남들보다 늦거나 여차하여 뒤늦게 서두르다가 적당한 때를 잃어버리지 않게 물들고 익어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않을까 문득 드는 그런 생각
그러니까 이전처럼 정신없이 살다가는 나의 단풍 시기를 놓쳐버릴 것 같아서 굳이 애를 써서 자연스럽게 어른의 색을 입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다음 계절의 세월에 당도했을 때 조금은 덜 후회하고 또 자연스럽게 살아지겠지 싶어서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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