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0. 그저 보내주면 될 것을.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핸드폰을 든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화려함과 녹음이 뒤섞이기 시작한 슬프고 다정했던 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겹벚꽃은 나에게 언제나 미안함이었다. 그 미안함은, 결국 또 다른 미안함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시간 되냐'는 선배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저 운동하는 곳으로 오실래요?"
사람은 미련하게도, 또 실수를 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선배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신다거나, 밥을 먹을 용기는 없었다. 그럴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율하 초등학교요. 여덟 시 반쯤에 만나요."
그 무렵, 나는 거의 매일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렸다. 아무도 없는 시간, 아무도 없는 공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가슴속 무언가도 함께 올라왔다. 몸이 지치면, 마음은 잠잠해지니까. 그때도 내 몸은 나 몰래 가끔씩 울었다.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나 혼자 아는 비밀로 남겼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나는 이상하게도 '운동장'이라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많은 기억이 있었다. 마음이 다글다글 끓어 소란스러웠던 시절. 내 옆.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기다림이 큰 위로였다는 것을,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먼저 도착해 천천히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발끝에 밟히는 자잘한 모래 소리가 다글다글 소리를 내며 고요한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한 바퀴, 두 바퀴..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몇 바퀴쯤이었을까. 달리며 선배가 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선배를 마주해야 될 테니까. 그냥.. 최대한 늦게, 마주하고 싶었다. 운동장 한편, 익숙한 등나무 아래 어렴풋이 앉아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어둠 속에 있어 다행이었다. 선배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운동장엔 조명이 있어 내 표정이 아마 고스란히 보일 텐데. 나는 지금 웃어야 할까, 아니면 조금은 처연하게 굴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애초에 그런 건 없었던지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선배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크게 숨을 불어넣고 내쉬었다. 그럼 웃어야지. 노선이 정해진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선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나는 선배에게 인사했다.
"오래 기다렸죠? 잘 지냈어요?"
"그래. 오랜만이네."
선배가 살짝 몸을 옆으로 비키며 대답했다.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나는 선배의 옆에 한 뼘보다 조금 더 먼 자리에 앉았다. 선배는 여전히 사람 좋은 인상이었지만, 어딘가 말라 있었고,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 물음 하나가 다정함으로 느껴질까 봐. 나의 다정함은 선배를 흔드는 매서운 바람이지 않을까.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온기보다 차가움을 남기는 마음.
그렇기에 나는 선배에게 다정할 수 없었고, 다정해서도 안 됐다. 어줍지 않은 다정함은, 쓸모없으니까. 따뜻해질 법한 순간, 슬며시 스며드는 추위. 그래서 마음을 더 움츠리게 만드는. 네가 나에게 그랬듯, 선배에게도 나는 꽃샘추위 같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선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괜한 말을 건넸다.
"그렇죠.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니까요.
저녁은 먹었어요?"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적당히. 넌 요즘 뭐 하고 지내?"
나는 선배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바람에 흔들리는 등나무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란히 앉은 선배와 나의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소리 없이 지나간 그 바람이, 선명하게 선을 그으며 선배와 나의 사이의 틈이 느껴졌다. 선배의 마음을 아무리 부어도 메워지지 않겠지. 그렇다면 애초에 기대조차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나았다.
"보다시피. 운동하고요. 학교 다니고요.
아르바이트하고요. 그리고 연애하고요. 그렇게요."
말끝마다 덧붙는'요'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조차도 내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란히 앉아 있는 선배와 나 사이의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 지금 내가 선배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다정함이었다. 진심이 언제나 따뜻한 건 아니니까.
"잘해주니?"
"잘해줘요."
나의 연애에 대한 질문이겠지.
선배는 나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짧고 고요한 침묵에 선배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너에게 느껴졌던 마음. 가끔은 바람이 감정보다 솔직하게 느껴졌다. 선배에게 미안하다 말했던 그날처럼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선배와 나의 사이를 채웠다. 말로 꺼낼 수 없는 수많은 마음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선배가 예전에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아무 말 없이 선배의 침묵을 받아주었다. 그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나름의 방식으로 보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끝에, 선배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잘 지내면 됐다."
"요즘 저 나름 괜찮아요! 선배는 요즘 연애는 해요? 어때요? 여자친구 있으시면, 담배는 끊으시고요.”
주절주절, 말이 자꾸만 많아졌다. 괜히 조용해지는 게 어색해서였는지, 아니면 나 스스로의 불편함을 감추고 싶어서였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좋지도 않은 거, 뭐 하러 피우세요.' 괜히 입을 댔다.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그냥 조용히 있었으면 좋았을 걸. 속으로 나 자신을 조용히 타박하고 있을 때, 선배가 살짝 웃은 것 같았다. 정말 웃은 건지, 아니면 삼켜버린 말의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다시 말이 없는 동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던 선배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고 움직이던 손끝. 그냥 꺼내도 됐을 텐데. 그 망설임마저, 나를 향한 아주 사소한 배려였다.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운동으로 달궈졌던 열기가 식고 나니, 바람이 피부에 서늘하게 와닿았다. 부르르, 강아지처럼 온몸을 한 번 털었다. 그제야 선배가 침묵을 깨고, 나를 향해 말했다.
"집엔 안 가니?"
"이.. 이제, 가야죠."
"늦었다.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 갈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얼버무리자, 선배는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조금은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좀... 네,라고 하면 안 되냐. 한 번쯤은, 네."
그 순간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는 선배와 나눈 말들 중에서도 유독 오래 남았다. 아마도 그게 선배가 건넬 수 있었던, 서툴고 조심스러운 방식의 진심이었을까. 다만, 늘 그랬듯. 선배는 항상 늦었다. 마음을 꺼내는 일도, 그 마음을 전하는 타이밍도. 늘 한 박자 느리게. 만약 내가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은 후에 그와 막 시작 되기 전에 선배가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듯 지나갔다.
그랬다면 나는 흔들렸을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내 대답은 아니. 내가 지금 그에게 관심과 호감이 갔던 건 '그'이기 때문이었다. 너와 내가 아무리 완벽한 타이밍에 만났다 해도, 연인이 될 수 없듯이. 선배와 나도 서로에게 완벽한 타이밍에 만났다 하더라도 연인이 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이밍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지 맞는 순간이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다. 속도, 방향, 깊이. 그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선배와 나는 나란히 긴 거리를 걸었다. 말없이. 천천히. 가로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그림자가 선배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집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땐 제가 어렸어요.
사과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그렇게..."
이 말을 꺼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사람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더 컸다. 마음을 받는 게, 그저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선배는 내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보자. 연락해도 되지?"
"네. 연락해요. 다음에는... 연애 이야기 해줘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나는 횡설수설 뱉어냈다. 선배와 보는 내내,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고 어설펐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고 꺼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말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내 머리 위에 툭 얹힌 선배의 손. 그 손이 너를 보내던 그날 마지막까지 네 손을 잡지 못하고 네 옷깃을 움켜쥐었던 내 손과 닮아 있었다.
그저 보내주면 될 것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지막까지 주춤거리던 나와 달리 선배의 그 손은 마치, ‘행복해라.’ 라고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는 아주 천천히 돌아섰고 나는 선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아무 이유 없는 연락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내 결혼식을 앞두고 눈이 부시게 맑았던 어느 오후 선배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행복해라. 잘 지내라."
그 말은, 어쩌면 나에게도, 그리고 선배 자신에게도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을지 모른다. 나는 끝내, 선배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 멀리서 오랫동안 나를 바라봐 준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말은 고작, '선배도요.' 그 한마디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했던 말보다 하지 못한 말들이 훨씬 오래 남는다.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그 단순한 말조차 하지 못했다. 왜 그토록, 그 한마디가 어려웠을까.
내 마음속 겹벚꽃은 피기엔 이미 계절이 지나 있었고, 언제 피어날지 모른 채 조용히 감춰둔 감정들만 남았다. 어쩌면 그건 끝내 전하지 못한 미안함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선배는 봄이 한창일 땐 눈에 띄지 않다가 벚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마치 타이밍을 놓친 고백처럼, 혹은 끝났다고 여겼던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계절의 미련을 닮은 그런 겹벚꽃이었다.
겹벚꽃은 스스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까.? 아니, 이제는 알 것 같다. 선배와 나의 계절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여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나는 믿는다.
부족한 저를
좋은 사람이라 믿어주시고,
묵묵히 바라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선배님, 어디에 계시든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