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1. 나에겐 너무 어려운 보통의 연애
봄과 여름. 그 애매한 경계에 오래 머물렀던 나는 상담을 받을 때처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손을 잡고 모든 것들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인 여름을 향해 걸어나갔다. 여름의 문턱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햇살은 조금씩. 천천히. 제 온도를 높이는 것 처럼 나는 그와 함께 할 다가올 것들에 미리 겁을 내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집으로 향하던 길. 우연히 눈에 들어온 건 이팝나무. 하얗게 피어 있는 꽃들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아래에서 한참을 서 이팝나무를 감상했다. 멀리서 볼 땐 그저 하얗게 뭉쳐 있는 덩어리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수없이 가느다란 꽃잎들이 하나하나 모여 제 몫의 계절을 피워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피어 있었지..?’
마음속에서 느린 감탄이 흘러나왔다. 계절을 온전히 살아내는 태도. 어떤 조건에서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피어난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 감정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문득, 지나간 그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과 연애를 하면서 늘 무언가의 탓을 했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의 나는. 이기적이었고 못돼먹었다.
늘 주기만 했던 너와의 관계, 받기만 했던 선배와의 관계를 지나,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그저 나를 좋아한다는 고백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쉽게 만나곤 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흐릿해져 버린 연애들. 그들은 나와 연인이 되면 많은 걸 함께하고 싶어 했고, 무엇이든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 '공유'라는 것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것은 아니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의 나에게 연애는 마치 역할극 같았다. 각자 맡은 역할의 감정을 흉내 내고, 정해진 대본에 따라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주고받는 일. '연인'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알지 못한 채. 태도가 아닌, 행동만을 주고받는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상대의 마음도 같을 거라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팝나무의 수많은 작은 꽃잎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듯이. 그저 멀리서 커다란 하얀 덩어리를 보고 하나의 꽃이라 단정짓듯이. 그때의 나도 그랬다.
기억난다. 기억이 나.
내 업이 기억난다.
그때의 내 연애 방식은, 어쩌면 조금 잔인했다. 감정은 없고, 그저 역할을 충실히 흉내를 냈다. 마치 아이들이 하는 소꿉놀이처럼. 어차피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언젠가 변하게 되어 있고, 영원한 건 없다고 믿었다. 그들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가볍고 변덕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나를 향한 감정쯤은 내 심술 한 번이면 무너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누군가를 상처 내며 웃었고, 깔깔대며 좋아했다.
'거봐, 사랑 같은 건 없는 거야.'
내 행동에 그렇게 면죄부를 줬다. 그게 내가 믿는 '보통의 연애'였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못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던 그때의 나는. 그와 함께하면서 비로소 진짜 연애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마치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생애 첫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서툴렀다. 입을 맞추고 혀를 옭아매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입술이 겨우 닿아 있는, 어색한 시간 속에서 마음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몰라 주춤거렸다.
세상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게 쉬웠던 나는, 이상할 만큼 그와의 연애가 어려웠다. 역할에 맞춘 행동이 아니라, 진짜 나의 태도로 그를 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감정을 내 식대로 재단하고, 마음대로 굴리던 익숙한 방식은 그의 앞에서 통하지 않았다.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서툴고 매 순간 실수투성이였다. 그렇게 내 서툶이 하나씩 드러났고, 내 태도에 망설임이 생겼다. 역할에 맞는 행동이 아니라 태도로 그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전엔 고민해 본 적 없는 물음들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말과 행동이 진심을 담고 있는 건지. 행동이 아닌 '태도'로서의 사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와의 연애는 마치 낯선 언어를 배우는 일 같았다.
익숙했던 연애 방법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그의 마음에 맞춰 나아가야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도 상했다. ‘왜 안 되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전 의식이 피어올랐다. 마치 게임의 마지막 보스를 만난 듯한 기분.
감정의 장르가 단순한 연애에서, 복잡한 연애 퀘스트로 바뀐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미션을 깨듯 다가가며,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상상했다. 보상 상자를 여는 순간처럼 두근거렸다. 언제였더라. 연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지갑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지갑 구석에서 전 여자친구의 증명사진을 발견했을 때. 그가 무딘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괜히 기분이 상했다. 내 보상 상자에 다른 여자의 사진이라니?
"이거 뭐예요?"
어른스러운 척 넘기려 했지만, 마음 한편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증명사진을 그의 눈앞에 팔랑거렸다. 흔들리는 증명사진과 함께 내 마음도 흔들렸다.
..?..
“그게, 거기 왜 들어가 있지...?”
정말로 당황한 얼굴의 그. 너의 마음에 아직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그 옆에 머물던 나는 어디 가고, 그에게 뾰족뾰족 날이 선 내가 있었다. 아직도 너를 마음에 품은 나를 잊은 듯.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나 갈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던 그 침착한 반응에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어줍지 않은 변경 따위 하지 않는 나를 조용히 보내주는 그의 태도. 내가 조금 진정되었을 무렵, 그와 나눈 대화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건 단 한마디였다.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이 아직은 조금 남아 있다는 말.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솔직함이 좋았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 거짓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진이 지갑 속에 있었던 건 정말 몰랐다고, 그것만큼은 자기 실수였다고 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내 눈앞에서 그 사진을 꺼내 조용히 불태우는 의식까지 치러준 건... 뭐, 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은 오히려 스스로 비난하던 죄책감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잘 생각해 보면, 마음이 쉽게 식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난 거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증명사진 덕분에 나는 어느 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전 여자친구의 실물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졌다.
내가 더 예쁘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전 여자 친구와는 내 얼굴로는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더 예쁘면, 게임 끝이지 뭐. 심지어 나는 귀엽지까지 하잖아?. 왠지 그날, 그렇게 화를 내고 돌아섰던 내가 조금 미안해졌다.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나는 그 길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베푸는 분(베풀 장 張) 봤다~?"
.....?
"우리 학교 근처에서 봤어! 크... 흡흡… 크흡… 나는 내려가고 베풀 장 그녀는 올라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아!!"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던 그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그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화기 너머에서 한참 동안, 키득키득 웃는 내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에게 내가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나 역시 그를 놀리는 게 너무 좋았다.
그녀의 성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한문이었고, 나는 종종 '이것 봐, 사람이 좀 베풀고 살아야지~ 그지?' 하며 놀리곤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때 그 증명사진을 진작 처리하지 못한 걸 뼛속까지 후회했다. 알고 보니 그 사진은 좀처럼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그의 지갑에 몰래 넣어둔 그녀의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그에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제 귀찮아. 그럼 안 할래', '이제 지겨워. 안 할래' 이런 말로 쉽게 돌아설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멈칫거렸다. 이런 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그'였기 때문에. 그였기에.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수 없었고 이 관계가 끝나면. 나에게 적잖은 타격이 올 것 같았다.
또한, 그와의 관계는 단순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으로 마음의 방향이 조금씩 기울었다. 너 외에 타인을 알고 싶었기에. 나는 더는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어딘가 유치하고 치사한. 그러나 내겐 꽤 진심이었던 '보통의 연애'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Jin입니다.
이제 9회 차(8회 + 에필로그)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한 회차에 글이 너무 긴 것 같지 않습니까? 의견 받습니다.!!! 적으면서도 이게 맞나 싶습니다. 피드백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 이 챕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계속 못 올리고 있었고. 사실 지금도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보통의 연애가 아직도 힘들구나. 소화가 다 된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글쓰기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오늘 회차가 조금 어색하더라도.. 'ㅁ'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 바지 가랑이 붙들기 / 오..오늘 챕터는 응원글 적어줘요.. / 꾸앵앵 / 지금 땅굴을 파고 두더지 처럼 숨어있습니다. 히잉히잉. 아 몰랑 올리고 도망가꼬야 ㅠㅠㅠ 히잉.
저에게 이서는 소중한 어린 시절입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 잘 버텨왔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아이이기도 합니다. 늘 공감해 주시고, 철없는 이서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