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9. Input, Output
50:50.
잘 구워진 쿠키를 반으로 뚝 잘라 나눠먹는 그런 기분. 쿠키를 반으로 자르며 후둑하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나답게, 그와의 연애는 전에 없던 신선 함이었다. 나는 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고 책을 펼쳤다. 책은 그냥... 페이크였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턱이 있나. 내가 진짜로 알고 싶었던 건, 책 속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나의 이야기였다. 그의 심장이 나를 향해 어떤 속도로 뛰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책을 읽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두 팔을 벌려 나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쿵- 쿵- 하고 느리게 시작된 심장은 곧 쿵쿵쿵 쿵쿵. 하고 빠르게 뛰는 소리를 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기에 충분했다. 확실하게 나를 향해 두드리는 그 소리가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와 나는 적어도 Input이 있으면 Output이 있는 그런 효율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눈치로 짐작해야 했던 너와의 시간들, 너의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고 싶어 애가 닳았던 그날들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그에게는 더 주고, 더 받고 싶었다. 다행히도 그와 나는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마치 부리를 맞댄 새들처럼 살며시 입을 맞추곤 했다. 하루는 내가 먼저, 하루는 그가 먼저. 가끔은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리고는 조금 쑥스러운 듯 마주 보며 웃었다. 그와 함께한 봄은, 말 그대로 봄 그 자체였다. 괜히 마음이 시큰해지거나, 다가올 끝을 예감하지 않아도 되는. 벚꽃은 그저 벚꽃일 뿐이었고, 봄은 그저 봄으로도 충분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은 계절. 아무런 의미조차 없어도 괜찮은 풍경. 그대로 흘려보내도 후회가 없을 만큼 단단하고, 잃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될. 다정한 봄이었다.
이 순간들이 너무 평범해서, 나에게는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어쩌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와 함께하며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여전히 너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나. 그와 나눈 다정하고 평범한 시간들 속에서, 이유 없이 문득문득 네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 중에 ‘너’와 ‘그’를 비교했다. 그와 나눈 모든 순간에 너와는 나눌 수 없었던 모든 순간들이 겹쳐 보였다.
같은 계절, 같은 길목.
그의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질수록 너와 내가 닿지 않았던 거리는 더 또렷해졌다. 너와의 기억들은 벚꽃잎처럼 가볍고 사소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시리게 느껴졌다. 아무리 애써도 닿을 수 없었던 그 거리에서 너와 함께 봤던 벚꽃은 늘 나 같았다. 눈부시게 피어 있었지만, 너라는 가지 위에서 언제든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지고야 말. 끝내 흩날릴 것을 알았기에 애틋했고, 그 애틋함은 불안, 외로움, 슬픔이 되었었다. 마주 보고 웃는 그 단순한 행동조차 왜 너와는 조심스러웠을까. 아직도 나에게 너는 꽃샘추위 같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봄바람이 나를 세차게 휘저었다.
나는 자꾸만, 다시는 볼 수 없는 너에게 되묻곤 했다. 나는 너와 왜 이런 봄을 함께할 수 없었을까. 왜 너의 옆에서는 이렇게 따뜻해질 수 없었을까. 손을 잡고 벚꽃 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걷는 그런 평범한 일조차 왜 너와 나에겐 그토록 어려웠을까. 너의 심장소리를 단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 이후에 너와 이별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질문들이 지금에서야 내 안에서 들끓었다. 이 질문은 어쩌면 내 욕심인 걸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봐?"
그가 조용히 내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벚꽃! 너무 예쁘다. 도윤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내 마음을 감추려고. 그는 내가 바라보는 곳을 잠시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감춰지지 않았던 걸까. 그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감싸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의 따뜻함이 말없이 천천히 나에게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저 너의 세상에서 겨우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인데.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벚꽃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는 걸. 가지로부터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말이 없어도. 말보다 더 따뜻하게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의 따뜻한 손끝 하나로 봄이 온전히 내 안에 머무는 듯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너무 오랫동안 꽃샘추위 같은 너의 세상에 있던 나는 그의 따뜻함이 좋았다. 문득, 상담실 문을 나서던 그날의 내가 떠올랐다.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더는 스스로를 붙잡아두지 않겠다고 조용히 되뇌던. 그날의 결심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걸까. 아니면, 다짐이란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겨우 힘을 얻는 걸까?.
나는 그 바다에서 너를 원망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너의 행복을 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너라는 지나간 계절에 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지나간 일들에 마음을 쏟아부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에게 한 없이 미안해졌다. 여전히 너를 품고 있는 내 마음이, 죄책감이 된다.
마음이라는 건.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다정함과 그리움, 미안함과 미련이 한데 뒤섞인 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나는 아직 한참 더 걸어야 할 길 위에 서 있고, 이 모든 감정은 결국 내 몫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 말 없이 내민 손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힘을 주고 자신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너의 곁에서는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어떤 마음들이, 그의 손끝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에게 전해졌다. 그 순간 마음 한켠에서 오랜 시간 무너져 내리던 감정들이 조용히 멈춰 서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그와 나 역시 완벽한 시기에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관심과 호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조차 모든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불안정했고, 그는 감정이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향한 관심에서 비롯된 호감에 이유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던 순간들. 서로를 향한 시선. 작은 떨림들. 눈치챌 수 없을 정도의 이끌림. 우리는 그 마음을 서로 나누기 위해 호감의 이유를 찾고 그 핑계를 찾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나로는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희망했다. 그와 나는 너와 내가 끝내 되지 못했던 '서로 위안이 되는 사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