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그와 나는 '종' 자체가 다른 ‘다름’이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관심에서 시작된 호감인지, 호감에서 비롯된 관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연인이 되었고, 그와 만나면서 문득, 너와 나의 '다름'과 그와 나의 '다름'은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마음이 다글다글해졌다. 다글다글한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출근길에 사온 사랑방 사탕을 손 닿는 곳에 두고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입안에서 사탕끼리 부딪쳐 다글다글 내 마음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선언처럼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혼잣말을 내뱉곤 했다.
“이것도 못하면 강이서가 아니지!“
이런 날은 하루 종일 예민해져서는 나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며 혹사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자세를 하고 이 정도도 못해내면 죽어야지라는 기분으로 모니터와 눈 싸움을 하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디자이너님, 뭐가 잘 안되요? 그런데 그거 다음주 금요일까지만 하면 되요.”
그 말 한마디에 잔뜩 긴장했던 내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풀어졌다. 그는 나를 타이르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조용하게, 마감일을 슬쩍 흘렸다. 그 말은 ‘서두르라’는 뜻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해 내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잊지 않도록 가볍게 짚어주는 말.
"아! 다음 주 금요일까지만 하면 되는 거였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내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들이 있다. 어쩌면 나는 입 안에서 사탕끼리 부딪쳐 다글다글한 소리로 나의 불안한 내 마음을 알아달라 표현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또 어떤 날은 프로젝트 관련한 짧은 회의가 끝난 뒤, 그가 나지막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디자이너님이 온 이후로는 한 번만 작업해서 좋네요. 업체에서 디자이너님이 작업한 것들을 전부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가 스치듯 건넨 말은 나를 하루 종일 웃게 했다. 누군가가 나의 일에, 나의 고생에, 나의 결과물에 가치를 느껴준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인정이니까. 그때만큼 나다웠던 순간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는 함께 일하면서 내 작업물에 대해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업체에게 들은 좋은 말을 스치듯 전해주곤 했다. 그와 나는 마음을 쓰는 방식이 달랐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우리의 '다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와 나의 '다름'은 그 차이가 아무리 커도, 내가 노력하면 좁힐 수 있는 거리였다. 내가 애를 쓰면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너의 습관들을 내 것으로 소화해 버린 것 처럼. 하지만 그와 나는 '종' 자체가 다른 다름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것 같은 거리감. 예를 들어 같은 숲 안에 있더라도 뿌리를 내리고 고요히 서 있는 나무 같은 존재가 그 라면, 나는 그 나무 위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리거나, 바람을 따라 훌쩍 날아가기도 하는 새나 다람쥐 같은 종류의 존재랄까.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도 큰 관심이 없었다. 마치 나무가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듯. 계절의 변화는 오직 피부에 닿는 공기나 온도,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의 길이로만 인지할 뿐이었다. 꽃이 피든, 단풍이 들든, 눈이 오든, 그런 것들은 그의 시선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비가 오는지는 꽤 중요한 정보였다. 우산은 챙겨야 하니까. 심플한 이유. 어쩐지 그게 묘하게 납득되었다.
그에 반해, 나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예쁜 봄을 좋아했고, 청량한 여름도 좋아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가을과, 청명한 하늘, 깊어지는 공기, 서늘한 바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겨울. 그 계절만의 얼어붙은 고요함과 시린 정적을 좋아했다. 나는 계절을 고스란히 느끼며 살았다. 아침 공기의 냄새로 계절을 짐작하고, 하늘의 빛깔로 날씨를 가늠하며 살았다. 그래서 내가 새나 다람쥐, 혹은 청설모 같은 존재였다고 설명한 것도 괜한 비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종’이 다른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좋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 어쩌면 그 방식이 그와 나의 관계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 다름을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그 거리감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그때의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멈춰 있는 것 같은 그와
늘 감정과 움직임이 풍성한 나.
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음속에서 여러 번, 오랫동안 곱씹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말하고 표현하기까지, 언제나 시간을 들였다. 밥을 짓는 것 처럼. 쉽게 끓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식지도 않았다. 반면 나는, 마음이 일렁이면 곧장 표정이 바뀌고, 쉽게 끓어올랐고, 그만큼 쉽게 식기도 했다. 모 아니면 도. 애매한 상태를 견디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나였다.
그와 나의 차이를 또 다르게 색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계절을 닮은 짙고 깊은 유채색이었다. 그의 색은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보였다. 명과 암. 처럼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색. 그의 조용함은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것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검정의 차분함과 하얀색의 단정함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짙은 감정에 휩쓸릴 때에 마다 나에게 휩쓸리지 않았다.
선배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파스텔이었다. whitish 같은. vivid 처럼 강렬한 나와 섞이면 금세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연한 파스텔. 너는 N5~6 정도의 회색에 가까웠다. 어딘가 흐릿하고 담담한. 짙은 유채색인 나를 감추기에 알맞은 색. 숨고 싶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네 곁은 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동시에 아이러니 하게도 나를 잃게 했다. 내가 선배의 색을 잃게 한 것처럼.
안녕하세요, Jin입니다.
부족한 저의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 있나'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월·수·금 연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는 흐름상 에피소드 18, 19, 20을 연달아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토·일·월 순으로 연재해보려 해요. 당연히 수, 금 연재는 함께 진행됩니다.
5월 10일 (토)
| Episode 18. 그와 나는 '종' 자체가 다른 다름이었다.
5월 11일 (일)
| Episode 19. Input, Output
5월 12일 (월)
| Episode 20. 계절의 후회 같았다.
5월 14일 (수)
| Episode 21. 나도 할 수 있다. 유치한 연애질!
5월 16일 (금)
| Episode 22. 이미, 다 저버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