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7. 어쩌면, 평범했던 그날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더라?
아이러니하게도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도 나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는지 궁금했던, 바로 그 시점까지만 기억이 난다. 그와 내가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강제로 스킵(Skip) 당한 기분.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어쩌다 그와 나는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호감과 관심 사이 어딘가를 맴돌다 무심히 시작된 걸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과도 같은 설렘도. 애매한 썸도 없이?
그러고 보니, 그와 내가 함께 나눈 시간들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 하루들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일하고, 퇴근을 하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작이라는 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스쳐 지나간, 조용하고 평범한 시간들.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모든 인연이 처음부터 반짝이며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아니라는 걸,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일이 꼭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걸. 미칠 듯한 끌림이 아니더라도 익숙함과 편안함이 천천히 쌓여 만들어진 관계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와 나는 어떤 사랑의 종류였을까. 그 특별할 것 없던 파란 티셔츠는 어쩌면 내가 너에게서 천천히 걸어 나와, 그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 시작점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랑 왜 만났는지 기억나?”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만났던 걸까. 생각해 보니 나는 그의 마음을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이건 내 연애 방식인 거였나. 내가 좋으면 되는. 나의 질문에 그는 갑자기?라는 의문형 눈빛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접으며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궁금할 수도 있지. 모오오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입을 다물었다.
기억나는 게 분명하다.!!
나는 강아지처럼 그의 옆자리로 건너가 팔에 찰싹하고 매달려 물었다. '생각 좀 해봐~ 아니 나 왜 좋아했는 데에~ 나를 왜 만났는 데에~ ' 라며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담아 말했다. 이 정도면 대답해 주겠지?라는 나의 치밀한 계획. 나는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바로! 나의 이 치명적인 귀여움.
“생각해 볼게”
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사에서는 세상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나에게만은 예외였다. 아차! 그 특유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안 봐도, 딱 그 표정이다. ' 망했어. 불길해!! ' 잠시 후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런 불길한 예감, 절대 안 빗나가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네가 날 먼저 좋아했잖아? 기억 안 나? 네가 좋다고 해서 내가 만나준 건데?”
뭐래?! 아니 그런 거 말고!!!!!
나는 눈을 번쩍 치켜떴다.
“좋아. 그렇다고 쳐.
그럼 정말로 나한테 마음 없었어?”
그는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왜 인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부른 포식자의 여유로움이랄까. 그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몸을 돌려 한껏 성이 난 내 어깨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웃음을 꾹 참는 듯 입술에 힘을 줬지만 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그리곤 한껏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나는 그에게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자우림 노래 부르는 걸, 괜히 들었지 뭐야.”
이건 나도 아는 내용이다. 그가 언젠가 나에게 말해줬던. 그는 회사 회식자리에서 간 노래방에서 자우림 노래를 부르던 나에게 호감인지, 관심인지 모를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딱히 가수나 노래에 대한 호불호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자우림의 김윤아님 목소리를 좋아했다며 그 목소리만 아니었어도 안 만났는데~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그것뿐이야? 더 없어??"
내가 다시 씩씩거리자. 그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서 너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라고 기억이 나겠어? 네가 좋으니까 만났겠지.' 라며 복어처럼 부풀어 독이 잔뜩 오른 나를 두고 '아이고 화장실이야' 라며 도망쳐버렸다.
... 뭐야? 부끄러워서 그래?!
아니면 나처럼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아닌데, 저 눈빛, 저 반응. 그건, 분명히 기억나는 사람의 행동인데? 분명히 기억나는 건데?!! 확신에 찬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의 손을 만지작 거리면서 '또 뭐 없어?' , '진짜 그게 다야?' 계속 물었다. 그는 나의 집요함을 알기에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기억나? 퇴근하고 머리 하러 간다고 했던 날.”
... 어?
“기억 안 나지? 내가 머리하고 나왔는데. 너한테 ‘머리 잘 됐어요?’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었어."
나는 눈을 끔벅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그런 메시지를 보냈었다고?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나? 내가 그런 문자를 했다고?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당황스러움과 어리둥절함 사이에서 맴돌던 나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그의 손길. 그 손끝에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느껴졌다. 형용할 수 없는. 갑작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거 보고 생각했지. 어..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건가? 그때, 너 다른 사람이랑 썸 타는 줄 알았거든."
제가.. 누구랑 썸을 타요. 이도윤씨 당신 훔쳐보기 바빴던 내 시간들을 곡해하지 말아요. 하긴, 그 당시에 나는 지나치게 친절했었다. 모두에게. 그는 아마 그걸 '썸'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 문자 아마 예전 폰에 있을걸?”
그와 내가 만났던 그때는 아직 '문자 메시지' 시절이었다. 메시지함이 쌓이면 먼저 온 건 자동으로 지워지는 그런 시스템. 그래서 지우고 싶지 않은 메시지가 있으면 따로 저장해 두거나, 수시로 뒤에 온 메시지를 정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아직 있다는 말은, 그가 그 문자를.. 일부러 지우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 내 문자를..?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저 흘리듯 말했다. 마치 그 메시지가 별일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널 만나 나의 이분법 적인 세계의 그 경계가 모호해졌듯이 그도 나를 만나 사소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세계가 질서를 잃는 것이 별게 아닐 수 있나?..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서 네가 어려서..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런 마음이 뭔데요..????'라고 의문이 들었지만 나 역시 그에게 더 이상 묻기를 멈췄다.
나의 물음에 자꾸 회피하고 장난을 치며 말하고 싶지 않아 한 그의 행동에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확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아니면 말고'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대충'이란 단어는, 내가 보기엔 꽤나 편리했지만, 그는 싫어했다. 나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시점이, 자우림 노래를 부르던 내 모습이었는지. 머리 잘 됐어요?라는 메시지가 계기였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게 뒤섞여, 어느 순간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인지. 그도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내가 먼저 관심이든, 호감이든 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멀지 않은 시점에 그도 분명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음을. 나는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머리 잘 됐어요?'라는 짧은 문장 하나에 그토록 많은 생각을 덧붙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스쳐 넘겼거나, 오히려 불쾌하고 말았을 일. 그런데 그는 그 한 문장을 붙잡고 있었다.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건가?'
'아닌데, 다른 사람이랑 썸 타는 거 아니었나?'
이 물음들이 그의 마음 어딘가를 스치고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나를 생각하게 했겠지. 그 자체가 내게는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같이 느껴졌다.
'나이가 너무 어린 건 아닐까.'
'지금 이 상황이 적절하지 않은 건 아닐까.'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그 질문들은, 어쩌면 나에게 자꾸만 기우는 감정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자기 자신을 설득해 보려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었다. 처음 나를 '디자이너님'이라고 부르던 그가 시간이 지나도 끝내 그 호칭을 놓지 않았던 것. 누구라도 가볍게 건넬 수 있는 농담 하나 없이, 오히려 더 무심하게 굴고, 더 철저하게 선을 그었던 모든 행동이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한 그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학교도 아직 졸업하지 못한 나를 보며 어른으로서 더 중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었을 수도 있고,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이었을 수도 혹은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통제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마음이 네게 자꾸 기울수록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것. 그의 말투, 시선, 아주 작은 행동에서 나는 아마도 그가 미처 감추지 못한 마음을 읽은 거겠지.
이제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를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나 역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좋아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나의 상처로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내가 누군가의 상처가 되는 일은 더욱 피하고 싶었다. 실수는 반복된다고들 하지만, 그 실수만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내가 연인이 되기 전. 내가 왜 좋았었는지, 관심이나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내게 말했었다.
아주 단순한 말.
거창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문장처럼 자연스럽고, 준비한 것처럼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왜 나를 곁에 두었는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너와는 달리 그는 분명한 이유를 내게 남겨주었다. 그 이유가 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사소함 속엔 나에 대한 깊은 배려와 나를 향한 진심이 있었다. 나는 그의 대답 하나로 오랫동안 흔들리던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언젠가 그와 내가 이별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왜 안 되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일 거라 느꼈다. 그는 변화의 순간에 침묵하지 않을 사람이자, 내가 왜 싫어졌는지, 어떻게 마음이 변했는지를 납득할 수 있도록,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지지 못할 기대를 내게 쉽게 남기지 않을 사람 같았다.
그와는 달리, 네 곁에 머물면서도 나는 내가 너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눈치로 짐작하고, 추측으로 그 의미를 채워 넣어야 했다. 추측은 불안을 낳았고, 불안은 마치 흙이 파헤쳐져 뿌리가 드러난 나무처럼 나를 자꾸만 흔들리게 했다. 아무리 뿌리로 흙을 쥐어도, 그 흙은 마른 모래 같아서 쥐면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곤 했다. 내가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네 옆에 있었는지, 나는 끝내 듣지 못했다. 너와 '끝났다'는 말조차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나는 끝내 알지 못한 너의 마음들과 네 곁에서 묻혀버린 물음표들만을 안고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그 틈을 사이에 두고 주저앉아 있던 나에게 그는 너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다른 이들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의 분명한 대답은 너와는 또 다른 방식의 구원이었고,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겐 위로였다.
그렇게, 그와 나는 관심에서 시작된 호감인지, 호감에서 비롯된 관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그와 나는 연인이 되었고, 나는 이 관계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