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절친한 친척 언니가 오전부터 혹시 통화가 가능하냐고 물어 왔다. 사실 난 새벽부터 가평에 끌려와 영 상태가 안 좋은 참이었지만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언니는 우리와 같은 항렬의 친척 큰오빠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들때문에 아침주터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가만히 들어보았다.
'지혜야 우리 이제 우릴 피곤하게 했던 사람들 이야기는 안 하고 살자. 말하면 우리만 힘들어지는 것 같아.'
이번 년도 초부터 부모님은 노후에 쓸 본인들의 세컨하우스와 할머니만을 위한 집 짓기에 한참 꽂혀 있는 상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로망만 충족하면 됐지 내 입으로도 '정말 좋다.'는 소리를 듣고 싶으신 통에 난 이미 부모님에게 잔뜩 질려 있었다. 나와 우리 부모님의 관계는 늘 그런식이다.
부모님은 본인들이 신나는 일에 나 역시 신나길 기대한다. 그러나 내가 떨떠름 하면 최선을 다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설득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면서도, 별로인 부분에 대해서는 입대서는 안 되며 그렇지만 즐겁게 자신들이 베푸는 것을 사용하고 또 그럴 때마다 감사함을 표하길 바라는 그 무언의 압박이 내게는 썩 불편하다.
어제도 엄마는 밤에 돌연 내일은 휴일이라 차가 막히니 새벽 5시에 가평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을 보여준 후 내게 감상을 묻길래 '그냥 그래요 별론데요. 근데 제 집도 아니고 엄마아빠 마음에만 들면 되지요.' 하자 돌아오는 길이 내내 불편했다. 벌써 몇년째 비슷한 일의 반복이다. 내가 스무 살 때는 집에 당구대를 들여놓고 싶어 했다. 나한테 의견을 묻길래 나는 반대라고,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쓸 수 있는 공간에 왜 개인의 물건을 상의없이 들여놓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화냈다.
'내 집에서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나가든가 해라! 내 돈으로 먹고 살면서!'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싸우기 싫어 집을 나갔다. 나가서 내가 내 멋대로 꾸며놓고 살다보니 부모님도 괜찮은 인테리에어 슬슬 욕심을 내셨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의 근본적인 문제란 자기 취향을 관철하는 일을 너무나 어려워한다는 데 있다. 이 말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자기 취향이 확실하지 못하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 본인들도 비즈달린 문, 방사능 같은 초록 타일이 별로라고 솔직히 고백했으며서 나랑 언니가 그래도 예뻐요하고 본인들 마음을 풀어주길 내심 바라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의 마음 속에는 어린 아이가 둘 살고 있다. 가족 밖의 사람들이 반대를 하면 금방 쭈그러들곤 하는 아이. 나이가 들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다. 엄마와 아빠는 함부로 굴었을 때 체면이 서지 않는 외부 사람들만 늘 어렵고 힘든 모양이다. 가족, 특히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좀 어리광을 부리신다. 왜냐면 자신들의 부모, 즉 조부모님들고 그랬으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받아 들여라. 나의 부모님은 천명(天命)을 따르듯 제 의견은 감춘다. 그리곤 밖에선 한 마디 못하고 집에선 고맙다 좋다 소리만 듣기를 원한다. 왜냐? 너희들은 내 편이니까
내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 집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의견을 낼 필요는 없지 않나? 나도 여러번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와 언니가 그 집을 자신들처럼 좋아하고 아끼길 바란다. 하지만 의견은 내지 않고 애교도 좀 떨고 자신들의 마음을 풀어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란다. 집을 바꾸느니 자신들의 마음을 달래는 게 더 편하니까
나도 싸우지 않고 살고 싶다. 하지만 내 뜻에 맞도록 살기 위해서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수긍해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책임감을 발휘하면서 가끔 가족의 일에 있어서는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하다. 가족 여행을 가도 그랬다. 스무살 때, 내가 온 가족과 일본, 베트남, 태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보다 다섯 살은 많은 언니와 서른살은 족히 많은 가족들이 다 쪼르르 서서 내가 길을 찾고 표를 물어 볼 때마다 가만히 기다렸다. 숙소, 음식, 관광지 등을 찾을 때마다 싫다 좋다 정도의 의견을 낸 것도 언니뿐이었다. 엄마 아빠는 상관 없어. 네 마음대로 해. 네 편한대로 해. 라고 해놓고 막상 가면 불만은 제일 많았다.
흥미로운 건, 우리 부모님의 이런 모습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아동, 그리고 청소년일 적 가족 여행도 늘 그런식이었다. 온 가족이 다 어디 갈 지도 마땅치 않게 날짜만 정한채 짐을 싸고, 당일 차에 타서 어디 가고 싶니? 하고 갈 곳을 정한다. 한 번은 내가 진도요, 라고 대답하자 아빠는 진도 구청을 쳐서 인천서부터 장장 3시간 정도를 운전했고 (어디 갈 지 모르지만 길이 막힐지도 모르니 이날도 새벽 4시에 출발했다) 우리는 인천 진도 구청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한 후 구청 소개 책자에 있는 곳들을 적당히 둘러보고 저녁이 되자 아빠는 114에 전화해 남해의 숙소 번호들을 문의했다. 휴가철에 토요일이라 만석이 아닌 곳을 찾다찾다 우린 수학여행지로 많이 쓰이던 원룸의 유스호스텔에서 잠을 잤다.
무계획, 무목표 그저 바람따라 마음따라 가는 여행. 엄마는 이런 여행에 진정한 낭만이 있다며 그 때를 추억했다. 나랑 언니는 별로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돈을 낸 것도 아니니) 속으로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빨리 어른이 되어서 이런 여행 좀 안 하고 싶다. 제발.
결정을 내리는 것, 그래서 책임을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구나 우리 엄마 아빠는. 특히 가족 내에 비난을 못 참는다는 인상을 나는 꽤 자주 받았다.이런저런 생각에 화나 있는데 친척 언니는 마침 잘 맞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이제 살면서 겪은 가족내의 기분나쁜 이야기는 더이상 되풀이하지 말자는 얘기다. '이미 옛날 일이잖아. 꺼내면 또 기분 나빠지기만 하고. 이젠 그냥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생각할까 해.'
친척 언니와 나 둘 다를 심히 귀찮게 했던 사람이 하나 있다. 나의 친척 오빠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예의상 친척큰오빠 라고 이야기를 하겠다. 그는 어린 시절 아주 다정한 사람이라, 나는 당시 기분파였던 우리 언니보다 내심 좋아라 했던 양반이다. 다른 애들이 그네를 타고 있으면 내 동생도 타고 싶어해 하고 말한 후,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해 내 자리를 만들어줬고 자기 장갑을 벗어 그네에 묻은 흙을 털어주곤 했다. 내가 울 때마다 왜 우냐고 다정하게 물어봐 줬던 그라 나도 어렸을 때는 사실 언니보다 오빠가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몰래 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사회에 나가 어느 순간 훼까닥 돌아버렸다. 다소 과격하지만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이 이상해졌다. 대표적으로는 내가 대학에 붙은 날, 부모님이 기뻐서 잔치를 벌였던 식당애서 이런 일이 있었다. 사촌들끼리 한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데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그가 돌연 내게 '그래서 어느 대학을 갔다고?' 라고 되물었다. 내가 ~~에 갔다니까. 라고 대답하자 그가 픽 웃었다. 그런 지방에 들어보지도 못한 곳을 갔어? 어딘지 알 수가 없네. 난 그날 오빠가 좀 취했구나 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었지만 되짚어 물어보니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오빠가 좀 이상하네, 취해서 그런가?
하지만 균열은 알아 챈 순간 걷잡을 수 없다. 오빠는 그 뒤 발로 나를 툭툭 차면서 커피를 타오라거나, 종종 내가 무슨 이야기만 하면 위 아래로 훑어보며 '너도 진짜... 어휴 됐다. 니가 뭘 안다고' 라고 중얼거리거나, 별 거 아닌 일, 이를테면 건네받은 젓가락을 상에 올리다가 젓가락이 떨어졌을 때와 같은 사소한 시점마다 '어휴, 야! 넌 뭐 똑바로 하는 일이 없냐.' 고 괜한 윽박을 지르는 일이 잦아졌다.
난 그와 한 번 밥을 먹고 나면 기분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져서 화를 내고 했는데, 사실 그때마다 보인 내 가족들의 반응이 더 상처였다. 내 가족들은 그가 무례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그에게도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냐고 그를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너는 멘탈이 너무 약하고 어리구나' 라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다. 사정은 익히 안다. 그는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고 엄마 아빠가 보시기에, 사실 자식은 적당히 때려서 조용히 만들면 될 일이지만 사회생활로 엮인 사람들에게 그런 짓을 했다간 큰일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라 나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친척언니에게도 틈만나면 '아줌마 같이 살졌다.', '너 같이 인생이 망한 애들은 참 좋겠다.'. '그딴 것 배우는 데 돈을 쓸 바에야 돈을 길에다 버리는 게 더 낫겠다.'. '니가 워낙 편하게만 자라서 생각이 없다.' 등과 같은 일명 '막말'을 쏟아냈고, 마침내 마지막까지를 그를 믿어주었던 작은친척 오빠까지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둘이 잠시 우리 아빠 창고에서 알바를 할 적, 그가 틈만나면 상자를 던지고 발로 차며 다른 사람들에게 욕하고 군기를 잡다가, 돌연 한 명을 잡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저 여자 가슴이 어떻냐느니 넌 가슴이 큰 게 좋냐, 변태다 등등 말도 안되는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작은오빠는 그가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고 믿으며 그를 도와주고 애써주었으나 큰오빠에게 이미 작은오빠와 나, 친척언니는 '편하게 사는 생각없는 애들' 이라서, 그는 어른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면 우리에게 은근한 진상짓을 반복했고 우리 모두 스스로를 위해 어른들에게 '힘든 오빠를 버리는 나쁜 애들' 소리를 들으면서 그와의 관계를 끊어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에서 끊어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먼저 끊어낸 건 큰오빠였다. 그는 언젠가부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친척들의 번호를 차단하여 우리 연락을 받지 않다가, 몇년 지나자 돌연 '애들이 나를 왕따시킨다.' 고 주장하며 하소연을 하다가 사실은 차단하는 바람에 연락처에 우리 번호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들통나기도 했다. (친척 어른들은 이럴 때마다 오빠가 사실은 착한 사람인데 힘들어서 그렇다고 그를 두둔한다. 그럴 수 있다. 어른들 앞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진상을 피우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도 비슷하게 기이한 사람이다. 편의상 큰오빠 동생, 즉 오빠 동생인 그는 나와 동갑이라 어린 시절에는 자매처럼 지냈으나 스무살이 넘어서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집에서 대학교를 다니기가 너무 멀어 힘들단 소리를 꺼냈다. 나는 그때 둘째이모네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면 이모에게 한 번 이야기를 꺼내봐라. 어렵겠지만 이야기는 꺼내볼 수 있지 않겠냐' 는 조언을 건넸는데 그는 그 조언을 대체 어떻게 이애한건지 몇달 뒤 돌연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지혜가 거기 살라고 했다. 그러니 며칠까지 방을 비워라.' 고 통보 했다.
내 이야기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한결 같이 이럴까? 큰이모네 집은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사를 한 4~5번 쯤 했는데 그때마다 수맥이라도 흘렀던 것일까?
그 당시 내가 정확히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설령 '내가 한 번 이모에게 말해볼까?' 라고 말하고 잊어버렸더라도 그는 이모가 아니라 나에게 말해봤어야 옳다. 이야기 한 번 꺼내 봤냐고. 그게 절차고 예의지 않은가? 그 뒤에 그가 이모네에서 벌인 행각들도 정말 말도 안되는 것들이지만 그 집 식구들이 이제 그냥 잊어버리고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굳이 쓰진 않겠다. 그래도 둘째 이모네 식구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이들이었는데 그는 끝까지 '둘째 이모가 나를 굶기고 학대했다.'고 주장하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지하철에서 몇 번이고 쓰러진 자신을 데리고 병원에 가줬던 작은 오빠나 대신 신발을 빨아주고 화장실 청소를 해줬던 친척언니를 욕보였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친척 어른들의 방식은 그의 형제, 큰 오빠를 대하는 방식과 여전히 같다.
누군가는 왜 인터넷에 이런 글을 써서 가족들을 욕 보이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억울하단 소리를 꺼내면 아빠는 자리를 피하곤 엄마는 너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쉰다. '그 때 거기서 밥을 먹자고 한 내 잘못이야.' 하고, 가끔은 그래 걔 이상하다. 라고 해주지만 아주 가끔, 단편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러니 여전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것은 나이고 그집 식구들은 힘든 삶을 살아서 아주 가끔 이상해지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판결을 보면 가끔 너무하다 싶을 때가 많다. 술먹고 습관적으로 자식들을 때리는 남편, 또는 아버지, 동생에게 계속 성추행을 일삼는 아버지 혹은 오빠 보다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못 견디겠어서 기어코 칼을 든 사람들이 더 강한 형벌을 받는다. 요즈음의 젊은이들,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은 매번 저녁 식사를 함께 할 때며 근래 본 뉴스를 이야기하며 '세상이 이상하다. 판결이 이상해.' 하고 화를 내는 것이 이젠 관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한국 사회의 내면으로 들어가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판결이다. 나의 큰 오빠와의 관계만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에는 기본적으로 '동네 시끄럽게 만들지 말아라' 라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폭력은 필연적이고 불가해한 것이며, 맞는 이는 죽거나 도망치지 않는 이상 이를 수긍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제까지는 이러쿵 저러쿵 사소한 것들에 '욕을 먹을 만하다.' 며 욕을 먹다가 자살하자마자 따뜻한 위로와 관심의 말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도 나는 비슷한 감상이다. 회사를 지독히도 다니기 힘들어 할때, 부모님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다니고 있지 않냐고. 진짜 못 다니겠으면 죽었겠지. 따라서 당시 퇴사대신 자살을 계획했던 나에게 죽음은 상당히 일리있는 귀결이었다. 이 사회에서는 죽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내가 힘들고 괴롭다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맞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평화는 맞는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균형처럼 보인다. 맞는 이는 원래 그런 이, 가해자는 마치 자연재해와 같고 이에 항의하는 피해자는 비가 많이 온다고 또 눈이 문이 내린다고 공연한 일로 힘빼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모든 구석에 적용된다. 이를 태면 인재를(人災)를 당한 피해자들, 가정폭력을 당하는 자식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 모두가 자신들의 피해를 토로하면 '괜히 동네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라는 말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별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사회의 반응에 똑같은 무력감을 얻고, 마침내 자신들 역시 사회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대답이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런 적 있는데, 원래 사는 게 다 그래.'
다른 나라들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한 전개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대한민국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공유하는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나라에선 깊이 살아 본 적이 없어 우선 대한민국의 이야기만 해야겠다.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건, 한국 사회에는 이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마라' 는 사상이 만연하게 퍼져있고 심지어는 미디어와 문화콘텐츠를 통해 끝없이 재생산되고 발전한다. 어린시절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좀 재밌게 보다가도 짜증이 나 덮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고등학생쯤 되자 내가 느낀 불쾌감을 선명히 표현할 수 있었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소설판을 읽고 있었는데, 성추행 (자세하진 않다)을 당한 여성이 울면서 아버지를 찾자 그가 되려 자식을 호되게 혼냈다는 일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 자식을 생각한 마음이 엄청난데 속으로 이를 삼키기 위해 어쩌구 저쩌구 이러쿵 저러쿵 .... 그래서 자식은 이를 장례식에서 알고 미워한 세월을 후회한다.
이런 서사는 정말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만연하다. 나의 감상은 언제나 같다. 아니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지 못한 죄책감을 왜 자식에게 씌울까. 피해자는 끝까지 약자다.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에게 모두가 감정이입을 하는 이 기이한 문화. 하지만 그럴싸하다. 왜냐면 피해자가 불쑥 일어나 그만 때리세요! 하고 말하는 순간 너무나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감정에 의한 폭력, 자기중심적인 행동 등 야만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다 문제 삼기엔 너무 번거롭다. 그냥 때리고 싶어서 때렸는데, 그냥 부끄러워서 조용히하라고 다그쳤는데 왜 때렸냐고 자꾸 물어보니 왠지 부끄럽고 짜증도 난다. 그러니 여기에 자꾸 서사를 붙여서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관계의 전복,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계층이동은 원래 큰 파란과 번잡하고 지난한 시시비비를 낳는다. 그럴 바에야 그냥 다같이 입다물고 있자는 것이다. '동네 시끄럽지 않게'
나는 때리는 아버지의 말못할 속사정따위 이제 별로 궁금하지 않다. 장발장은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치는 바람에 긴 옥살이를 했고, 이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달라진 삶을 살겠다고 종교 앞에 맹세한다. 그리곤 과거 자신의 가족들처럼 어렵게 사는 코제트를 입양해 진정 사랑으로 키운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도 이정도만 했더라면 나도 입다물 자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옥살이는 커녕 종교 앞에 새 삶을 살겠다고 울며 회개하지조차 않고, 자신의 죄를 선행으로 갚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런 나를 좀 이해해달라고, 피해자와 세상을 대상으로 억울해할 뿐이다. 세상살이가 어려운게 억울한가? 그렇다면 가정을 이루지 말고 혼자 살지 그랬나. 그리고 사는 건 원래 억울하다. 이 세상은 나에게 맞춰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럴거면 태어나지 말지 그랬나.
오히려 나는 어린 시절에는 무력하게 있었더라도 자라마자자 용기있게 때리는 아버지 앞을 막아서는 어떤 여성, 남성 들의 서사가 궁금하다. 이들의 영웅담을 듣고 싶다. 폭력과 착취를 일삼는 가족들과 의연하게 의절하고 용기있게 어렵게 제 삶을 살아가는 여성, 남성 들의 서사를 보고 싶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배우의 파워도, 파격적인 묘사 등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오랜 피해자들이 이젠 문동은(송혜교)처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회사, 가정 내에서 오래 맞고 지난 그들은 왜 맞을만 했는지 왜 때릴만 했는지에 마땅한 서사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 있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도. <더 글로리>의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서사가 좀 더 온건하게, 좀 더 다양하게 보편화되었으면 그래서 가해자를 파라보는 판결과 세상의 시선도 마침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렇지만 물러서는 것, 잊어버리는 것 또한 개개인에게는 답이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그러자고 했다. '그래 언니, 우리 억울하게 당하고 산 거 그 자체는 잊지 말자. 그치만 얘기만 그만 하는거야. 얘기하면 우리 기분만 나빠지니까.'
그 후 이틀 정도 지났는데 언니와 나의 대화는 '그래서 엄마가 큰 이모도 여행에 꼭 데려가라는거야. 난 너무 기분이 나빴거든? 왜냐면 거기 큰 오빠가... 어휴 됐다. 그랬잖아? 그래서...' '그럴만하지 큰 오빠가 나한테도 ... 어휴 됐다. 그랬으니까. 근데 이모는 왜 그런데?' 옆에서 보면 ??? 싶어지는 대화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짜증나는 인간인거 안다. 그래서 욕할대로 했고, 이젠 우리를 위해서 앞으로 이 증오가 재 생산 되지 않도록 행동할 것이다.
왜 엄마 아빠가 집 짓는데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고 했으면서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 이어지는 이야기다. 요 며칠 나는 1일 1글을 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아무런 글도 올리지 못했는데 이유가 있다. 나는 최근 연세가 82이 되신 외할머니가 하루아침에 폭삭 늙으신 모습이 다소 마음 아파, 할머니를 데리고 대만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낸 적 있다. 그리고 대학시절 나를 보살펴줬던 둘째이모도 해외여행 경험이 없으니 함께 모시고 가고 싶다고 했다. 비용은 내가 절반 이상 부담하겠다고. 엄마는 좋다고 해놓고 엄마는 며칠간 나를 계속 떠봤다.
'근데 큰이모도 데리고 가면 안 돼?' '큰 이모가 가면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 '큰 이모가 끼면 싫지?'
엄마는 내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큰 이모네 식구들간의 지지부진한 악연, 큰이모의 아들과 그 동생이 내가 이모를 모신다고해서 비웃으면 비웃었지 고맙다 하지는 않을 위인들이라는 점, 그렇다고 엄마나 그집 식구들이 비용을 추가로 대지도 않을 거라는 점 등을 여러번 얘기했지만 엄마는 알겠다고 그때만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라고 하고 돌아서면 골똘한 표정으로 되묻는 것이다. '근데 큰이모 진짜 가면 안 되는 거지?'
이유는 동일하다. 엄마도 큰이모가 끼면 곤란해질 걸 안다. 중국어 조금, 영어 조금 할 줄 아는 내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될 거라는 것도. 그럼에도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결정을 하고 책임을 져주길 바라는 거다.
일련의 사건들로 나는 의연하다. 그리고 내겐 동지들이 있다. 난 결국 큰 이모를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엄마는 석연치 않아 했으며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라고 했지만 결국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어른이 되고 기뻤던 일 중 하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어른은 결정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나도 이런 엄마를 가질 수 있다면 좋았을테지. 하지만 난 우리 엄마도 좋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그냥 사랑하는 거지. 어쩌면 가족 내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 파생되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