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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Aug 21. 2023

#3 영원, 지속, 불변: 달콤한 무상(無想)

영원에 대한 바람



최근 언니와 둘 중 무엇이 더 이상하게 들리는지 언쟁을 했다.
'연예인과 나 사이의 궁합 보기 vs 실존하지 않는 인물들의 (ex 소설 속 캐릭터) 사주팔자를 구해 인물들 간의 궁합 보기'

난 당연히 거부감으로 따지면 전자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말도 안 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니 나 역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내 주위의 20~50대 사이, 열명 정도의 여성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후자가 더 이상하다고 답했다.

전자를 고른 나와 내 영혼의 반쪽들 (이번 일에 한하여)의 의견은 이렇다.
실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 몰래 생년월일 같은 개인적인 정보를 구해 궁합을 보고 따지는 것은 무례하게 들린다. 특히 상대가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는 점에서 연예인이 만일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섭게 느낄 수 있다.

반면, 후자가 더 이상하다고 답한 대다수의 의견은 이렇다.
- 캐릭터에게 생년월일이 있는가? 캐릭터는 살아있지 않다
- 너 어디 가서 이런 거 물어보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니까 앞으로 이런 건 꼭 우리끼리만 이야기하자
- 일단 갓반인들에게 이 행위(캐릭터의 사주팔자 풀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 연예인은 공인이 아닌가? 이상형 월드컵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전자는 그냥 흔한 행동 같다

아무도 읽지 않는 블로그라 별로 기대하진 않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인은 어떤 게 더 이상하다고 느껴지는지 답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당연히 전자가 더 이상할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설문조사였는데, 후자의 비율이 압도적이니 어느 순간부터 흥미로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통의 규칙을 가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개개인이 세상을 인지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한 것은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왜 후자가 더 이상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이 사람은 ~~ 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요, 다소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사랑에 나름 재능이 있다. 친구 하나 없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도, 난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설 등을 보며 사랑할 대상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상상을 하며 감정적으로 충만한 시절을 보냈다. 왜냐하면 캐릭터는 작가가 창조한 개념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제시된 그 순간부터 작가와는 분리되어 그 자체로서 내 안에 실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보고 자란 환경에 따라 어떠한 의도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작가와 결코 동일하지 않은 경험을 통해 자라난 나로서는 이 인물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인지할 순 없다. 나뿐만 아니라 팔십억 명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세계와 역사를 갖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작가가 '폭력적인 사람'의 형상을 그려내도 누군가는 거기서 슬픔을, 누군가는 거기서 자기기만을 읽어낸다.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되었다고 해도, 강아지가 네 발로 걷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진화한 것처럼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자연스럽다'라고 인식되는 기준 선이 있기 때문이지 결코 '완전히'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세상에 제시된 그 순간부터 이를 받아들이는 향유자 개인의 것이 된다. 물론 이 캐릭터를 활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기본적인 저작권은 당연히 창작자에게 있지만 이 캐릭터를 읽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모두가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덴지는 당신의 덴지와 다르고 나의 이타치는 당신의 이타치와 다르다. 같은 행동을 했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가 모두 다른 개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작물을 활용해 만드는 2차적 저작물은 탄생의 적법함이야 당연하게도 원창작자의 용인을 필요로 하겠지만, 탄생한 2차적 저작물의 저작권은 2차적 저작권자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캐릭터와 달리 어떤 '관념'으로 구체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 순간 변화하고 달라지며, 죽어가고 또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편하게 인지하고자 '너는 이런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려고 애쓴다. 별자리에 따른 성격론이 그랬고, 혈액형에 따른 성격론이 그랬으며 현재는 MBTI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을 뭐라고 단정 지어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걸까? 그렇게 혼돈을 무언가로 '정의'하고, '규정'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나를 충만하게 만드는 삶의  모든 것들이 단숨에 사라지고 또 존재조차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 두려운 걸까?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년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다. 에세이치고는 소설 같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결말이 다소 얼렁뚱땅하게 나 버리는 이 책은, 여전히 읽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극심하게 나뉜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삶은 혼돈이며, 그렇기에 슬프고 그렇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 명료한 진리인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감상을 이야기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의견은 이렇다.


삶, 그리고 이 삶을 채우는 사랑이나 추억과 같은 것들이 찰나의 기적과 같다는 사실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이 언제든 꺼질 수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고 누군가에게는 허무맹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만한 권리가 없는 탓에 어떤 것이 더 맞다 틀리다 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 역시 사람을 찰나의 현상으로 보는 편이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계속 바뀔 수밖에 없고, 삶이란 게 변화무쌍하여 오늘은 기뻤다가 내일은 괴로울 수밖에 없게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저 나날이 비슷하고 평온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울며불며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직업이 없다는 상태 자체가 너무 두려웠고,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나는 어찌어찌 살아 있다.

누군가는 나를 '엄마아빠를 등 처먹는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젊은 MZ여성'으로 보고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해서 존재하는데, 오늘 회사를 그만뒀다고 어제까지는 책임감 있는, 나름 유명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게 참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퇴사했어? 24시간 됐지? 땡! 넌 이제부터 책임감 없는 MZ다.

그러나 누군가는 또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사실 내 안에서도 그랬다.

그래도 얘는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회사를 다녔으니까 한 달간은 MZ에서 면제해 주자.
아니 열심히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1년마다 회사를 옮겨? 책임감이 없는 거다 딱 MZ다.
하지만 이뤄낸 성과를 봐 2023년까지 야근수당이라는 개념 자체가  도입이 안 된 업계에서 불평 없이 잘 다녔잖아? 하지만, 야근이 많다는 거 할 일을 제시간에 못 끝낼 정도로 미적미적 능력 없다는 소리 아냐? 게으른 게 자랑이야?
하지만, 넌 내가 어떤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르잖아. 난 지난 시간 동안 대체할 수 없는 성과를 냈다고
하지만,
또 하지만, (중략)

사람을 어떤 '상태'로 분류하는 이 행동 자체가, '지속(持屬)'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냥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매 순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다'라고 규정하고 내 안에 형상으로 만들어 좋아하네 싫어하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 폭력적이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은 정말 '그'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사실 거울에 비친 빛무리를 보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가수 이승윤의 노래, <영웅 수집가>는 이러한 마음을 완벽히 대변하는 가사를 갖고 있다. 흠집이 나면 버리고, 네 자리는 여기까지야. 그러게 완벽하지 그랬어.라고 말하는 건 그 순간순간에는 굉장히 합리적인데 모아놓고 보면 너무하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모든 의견들이 그래도 다 귀담아들을 만한 무엇이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 해야지.'라고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해서 결국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수십 년 전부터 목장이 존재하던 곳으로 근래 이사를 한 사람들이 냄새가 너무 심해 못 살겠다고 꾸준한 민원을 넣다가 견디지 못한 목장주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선생님 그래도 그건 아니죠.라는 단편적인 사건 하나하나에 민원을 넣다가 근래 초등학교에서 사람이 자꾸 죽어나간다. 내 친구는 갖은 노력 끝에 공무원이 됐으나 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 업체에서 몇 년간 일해 온 입장에서, 생각보다 사람들은 몇백 원 몇천 원 받지 못하는 사건마다 누가 누가 더 심하게 욕할 수 있는지 경쟁하듯 글을 올리고 회사는 그 한 줄 한 줄을 가지고 왜 대비하지 못했냐, 왜 생각하지 못했냐고 왜 그렇게 멍청하냐고 혼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모든 의견이 늘 가치 있기 때문에 나는 늘 멍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잘난 듯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실상은 뻔뻔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일삼을지도 모른다. 개개인에게 화살을 돌리는 건 당장의 해결책이지만,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이와 같은 폭력을 당하면서도 저지르고 저질러놓고도 모른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는 사회 구조 자체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기준이란 건 안타깝지만 존재하지조차 않는다고,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실존하는 인물과, 실존하지 않는 인물의 사랑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전자도 후자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맞는 이야기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응당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울분이 있기에 전자가 다소 폭력적이라고 여기는 것이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려면 '일반적인 가치관'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잘난 듯 이렇게 글을 써도 실상은 여기저기 적응을 못하고 툭하면 회사 못 다니겠다 죽겠다 약한 소리를 하고 결국엔 백수가  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밥벌이를 잘하고 있지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내 삶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이들의 삶이 맞다고 여겨진다면 결국 맞고 틀리다는 전제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더불어, 전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맞나 고민하던 나에게, 후자가 이상하다고 말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위로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인물을 이상화하고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정당한가 고민하는 내게 다정한 지인들은 하기와 같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 상대가 안다면 그때부터 징그러운 일이 된다. 집에서 혼자 몰래 생각한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 머릿속에 그를 토대로 한 최애_ver2를 만들어 그를 사랑하도록 해라. 모든 오타쿠들은 이미 그러고 있다
- 원래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다들 몰래 사주 사이트에 돌려보고, 획으로 사랑해 써보고 그러고 산다
- 발산하지 않는 감정이 자꾸 커져서 더 힘들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너만의 <그놈은 멋있었다>를 한편 써라

위와 같은 의견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이 모두를 사랑하기 위해 엄마를 보내줬다는 말처럼, 삶은 개개인이 인식하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먼 옛날 인류는 각자의 지혜를 빌리고자 모여 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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