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배를 들으러 교회를 찾았다. 서빙고 역 근처에 있는 교회는 꽤 오랜 역사를 가졌음에도 예배당은 생각보다 세련된 모습에 아담했고 신도들 중에는 나처럼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많아봐야 스무살쯤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 중에는 예배 내내 귀를 만지거나 손톱을 뜯거나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지루하다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이들이 몇 있었는데, 그 옆에는 십중팔구 진지한 얼굴의 부모가 앉아 있는게 인상 깊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지루하지만 예배를 듣고 부모와 함께 집에 돌아오는 그들의 삶은 어떨까. 가족, 친구, 친지 아무도 종교가 없는 나와 그들이 태어나 살아온, 또 살아갈 삶과 세계는 나와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교회에 대한 내 기억은 초등학생 시절이 전부고 그 당시 집근처 교회들은 지금보다 공격적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벨을 누르고 사람이 있는 티를 내면 문 앞에서 몇십분을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들었고, 학원이나 학교에 가던 길에 심심찮게 붙잡혀 비슷한 설교를 들었다. 결국 모든 말은 '우리 교회로 나와라' 로 통했는데, 당시 나는 꽤 반항하길 즐겨서 괜히 서서 '하나님이 공룡도 만들었나요.' 따위의 소릴하면서 몇십분씩 그들과 대화하는 걸 즐겼다.
사실 그들의 관심 자체를 꽤 즐겼던 것 같다. 어린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매일같이 외로웠고, 어딘가 속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에겐 알리지 않고 일요일에 몰래 교회에 가 찬송가 모음집을 사거나 헌금도 냈고 (비록, 1,000~3,000원 정도였으나 당시 내겐 큰 돈이었다.) 때때로 시간이 넉넉한 토요일 하굣길에는, 너 어디 사니 집 전화번호가 뭐니 하는 물음에 아무 번호나 불러주며 괜히 옆에서 알짱거리곤 했다. 신이든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불신 (不信) 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의 부모님이 결국 교회에 대한 내 호기심을 눈치채고 호되게 혼내며 다신 말없이 그런 데 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내 짧은 종교 생활도 끝이 났다.
그 후, 엄마가 방학때도 애들을 맡아주고 먹여준다는 친구의 꼬임에 속아 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여름이면 성경캠프에 갔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속 자리한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했다. 성경도 읽어보고 싶었고, 서브컬쳐를 접하다보면 줄줄이 묻어나오는 기독교적 메타포가 궁금하여 가겠다고 했는데, 여름 성경 캠프에 오는 애들은 이미 매주 주말마다 몇년씩 알아온 '절친'들이었다. 학교에서도 친구 하나 못 사귀던 내가 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신이 정말 있다면, 당신을 궁금해하고 사랑과 공동체를 간절히 원하는 내게 왜 이렇게 모질게 굴까? 신은 나를 미워하나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당시 난 11살이었고, 지금은 거기에 곱절은 더 나이를 먹었으니까. 요즘은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같은 한국에 살고, 한국말을 쓰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왔고 제각기 다른 세계는 모두 각자의 규칙을 가진다고 말이다. 특히 종교가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같지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 가족들, 그러니까 나의 엄마, 아빠는 내가 본인들을 '우린 가장 가까운 타인' 이라고 칭할때면 늘 섭섭해하지만 사실 본인들도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마치 타인처럼 대했다. 나쁜의미도 아니고 부정적으로 곡해하려는 까닭도 아니며, 정말 말 그대로다. 그래서 어린시절엔 가끔 엄마, 아빠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데, 나이가 들면 저렇게 어색한 사이가 된다고? 그게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 일인가?
신기한 일이다. 엄마와 아빠는 완전히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왔는데 신기할정도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세상에는 부부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 이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내고, 원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두 사람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새 가정이 얼마나 특별한지 증명하는 일종의 상장이다. 이를 증명하듯, 내가 두 사람에게 왜 결혼을 했냐고 물어봤을 때 엄마와 아빠의 대답은 이러했다. 엄마는 집에서 나오고 싶었고, 아빠는 형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다른 단어를 사용했으나 같은 뜻이다. 원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어서 새로운 가족을 만든 것이다.
심지어 엄마는 딸딸딸딸아들로 이루어진 다섯 남매중 셋째로, 갑자기 사라져도 알아채기 어려운 존재를 담당해 왔다. 외할머니는 아직도 엄마를 어려워하고 이모들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아직도 이모들을 보며 '왜 그러는지 몰라. 이상해' 라고 이야기 한다. 엄마는 내게 옛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고 마치 엄마의 처음이란 언니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처럼 이야기 하곤 한다. 가끔 막내 이모에게 듣는, '화장을 좋아하고 예뻐지고 싶어하는 두살 터울의 언니'는 내게 아주 낯설다. 엄마는 스물 한 살에 결혼했는데 가끔 졸업식 다음날 취직하고, 그 다음날 결혼하고, 그 다음주에 결혼하길 바랐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학교도 다니기 싫었고, 일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고. 엄마는 하루 아침에 인생에서 할 일을 다 끝내놓고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고.
아빠는 할머니가 마흔살에 낳은 막둥이로, 큰 형(나에게는 큰아버지)과 자그마치 스무살 차이가 난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큰아버지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아빠는 가족 내에서 누구와도 진심을 터놓진 못했다. 일본서 화물차를 운전하며, 조선인 치고도 부자로 살았다던 친할마버지 밑에서 자란 큰아버지, 큰고모, 작은고모는 난데없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집도 절도 모두 잃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귀국한 조국에서 십몇년을 산 후에 태어난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아버지를 제일 아꼈으나 아버지 스무살 적에 이미 환갑이었고, 전 재산을 잃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리던 친할아버지는 아버지 중학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진 알 수 없다. 아빠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친가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완전히 관계가 끊겼으며 그전에도 형이나 누나가 몇명 있는지 내게 말해준 적 없다. 심지어 나는 아직도 매번 설이며 추석이며 성묘를 가지만 친할아버지의 사진도 본 적 없고 성함도 모른다. 아빠 역시 어린 시절은 엄마와 결혼하기 1년 전, 88년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며 운전면허를 따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학창시절 담배도 피우고 만화방을 다니고, 지각을 밥먹듯이 했던 이야기를 농담삼아 몇번 꺼냈을 뿐 내게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야기해 준 적 없다.
친할머니는 100세가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끝에 몇년엔 치매가 심해 나도 언니도 못 알아봤다. 다만 '우리 막둥이' 만 기억해서 가족들끼리 찾아가면 내내 아빠만 찾고 아빠 이야기만 했는데, 그럴때면 아빠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않고 마치 남처럼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어느새 보면 구석에 숨어 휴대폰 게임만 실컷 해댈 뿐이었다. 할머니와 온 가족이 같이 살 때에도, 우리 가족중 할머니와 가장 많이 이야기 하는 건 웃기게도 나였다. 아빠는 할머니와 있으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고, 할머니는 그런 아빠가 익숙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와 아빠는 대체 이토록 어색한 자신의 부모와 어떻게 살아 왔던걸까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니 우리 가족들은 서로를 가장 편하게 여기지만, 식사만 마치면 각자 1m이상 (여의치 않는다면 최대한 멀리) 떨어져 몇 시간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못하면 답답해 미치려고 한다. 엄마와 아빠는 식사 후에는 그보다는 자주 더 많은 대화를 하지만 우리와는 도무지 할 얘기가 없다고 여겼고, 학창시절에도 성적이나 기타 이야기는 모두 식사 시간에 대화하고 끝냈다. 떨어져 사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친한데, 엄마는 아빠와 언니는 나와 살기 때문이다.
엄마는 언니에게 전화해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말하면 언니는 그렇구나. 하고 자기 감상을 이야기 하고 일분정도 침묵을 지킨 후 밥은 먹었어? 응. 그래 쉬어. 하곤 끊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대화의 전부다. 언니는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고, 아빠는 별 일 없냐고 한 마디 하러 몇달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한다. 대학에 가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또 직장을 다니면서 사람들은 가족들과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하고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했고, 학창시절 내가 느끼던 답답함과 외로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가족은 나 빼고는 대화를 싫어한다. 그게 내가 살던 세상이다.
이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이상할정도로 말이 너무 많고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타인의 세계가 너무도 궁금한 내게는 나의 가풍(家風)이 도저히 맞질 않았다. 가끔은 이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같은 유전자를 섞는데도 계속해서 전혀 다른 인간이 태어난다. 80억 명에게는 80억개의 세계가 제각기 존재하는게 아닐까? 우리 부모님은 둘이 한 잔 걸칠 때면, 내가 참 신기하다는 대화를 종종 한다. 어떻게 우리 사이에서 이런 애가 생겼을까? 그러게나 말이다. 난 우리 부모님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세계 중 일부라서 가장 편한 존재들이다.
이처럼 나에게 있어 내 부모님은 너무 달라 늘 탐구의 대상이었기에, 세상 역시 그렇다. 종교에 대해 공부해보자고 마음 먹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존재가 확고히 존재한다고 믿는 이는, 세상에 대해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러니 믿음에 대해 공부하고, 더 발견해야만 어색하게나마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인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독교와 그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나에게 있어,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궁금증의 대상이었다.
예시로 가장 최근에 본 신점에서, '이 다음 회사에서는 엄마 같은 상사를 만나, 강의를 할 거다' 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아 치워두었던 기억인데,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께 갑작스레 학원 강사직을 제안 받자 불연듯 그 말이 떠올라 선생님께 신났다고 이야기했다. '그 무당이 정말 용한가봐요.' 라는 호들갑과 함께. 말하고 나니 기억이 났다. 선생님은 교회 집사를 지내면서 사십 평생 하나님을 섬겨온 뼈독교인 이라는 사실이.
아니나다를까. 선생님은 내 말에 기가 차다는 듯 신실하게 '너, 정말 그럴거야?' 라고 반문하기는 했으나, 말도 안 되는 무당놀음이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 줬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는지 한껏 인자한 목소리로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렇게 내게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 그분께서 무당의 입을 빌려 너를 내게 인도했네.'
당시엔 웃었는데 지나고보니 꽤 인상적인 대화라 아직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선생님의 세계에는 무속이란 없구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신선한 깨달음이었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 이야기하자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는 3년을 좋아한 나조차도 생소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내가 '아 진짜요? 그럼 그 가수도 기독교려나? 몰랐는데.' 같은 무심한 질문을 하자 기가 차다는 듯이 '당연한 거 아니니? 넌 어떻게 좋아한다는 사람 종교를 몰라?' 하며, 줄줄이 생전 궁금하지 않았던 목사님의 인생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떻게 좋아한다는 사람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도 모르냐.' 고 반문했던 일 등등 (난 그 목사님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허튼) 선생님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법칙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 점이 참 흥미로웠다.
난 삶의 절반 정도를 선생님과 알고 지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나와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타인 중 하나인데 그 분의 세계에 대해서는 여직 아는 바가 적다. 평생 노력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당분간은 즐겁게 알아볼 생각이다. 먼 옛날,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기 위해 대륙을 건너갔던 이들은 어쩌면 등잔밑이 어두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장 나와 한평생 알고 지낸 부모도 지인도 이토록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데 굳이 멀리까지 가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볼 필요가 뭐 있냔 말이다.
평생 가도 내가 아는 세계는 아주 일부분일 것이다. 슬프고도 즐겁지 않은가? 난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겁고, 그들의 다채롭고 기묘한 생각과 언어로 구성된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매번 즐겁다. 세상은 이렇게 매번 내게 탐구할 거리를 던져준다. 역시 작년에 죽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요즘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