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수업을 마치고, 요즘 자꾸 학원에 늦게 오는 학생 하나에게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가벼운 스몰토크였는데 그 말에 학생의 이야기 둑이 퍽- 하고 열리기라도 했는지, '선생님 그게 있잖아요.' 하고 왜 요즘 사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특별하고 사소한 고민들을 대뜸 털어놓았다.
이것도 고민, 저것도 고민이지만 역시 제일 큰 고민은 고민이 너무 많아서 그로 인하여 생긴 불안에 미래를 잡아먹힐까봐 고민이라는 거다. 한 문장에 '고민'이란 단어가 대체 몇개나 들어간 건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학생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는 나도 그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로 밤낮없이 고민하고 울고 불안해하고 남들이 툭 치면 와르르 쏟아냈다가 남이 나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면 괜히 부끄러워 화를 냈다. '난 이렇게 심각한데 지금 웃음이 나와?!' 하고. 그래서 학생이 귀여웠으나 티를 내지 않고자, 또 웃지 않고자 진지한척 내 나름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아마 우리도 처음엔 그랬을 거다.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이고. 가족 밖에도 사람이 있고 가족들 역시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각자의 우주와 언어로 살아간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두려웠던지 생각해보자. 대학시절 웹툰 스토리텔링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님께서 진정한 성장 서사란 관계 안에서의 투쟁 뿐만 아니라 세계와 주인공과의 투쟁도 필요로 한다고 칠판에 이런저런 도식을 써서 보여주신 기억이 있다. 살아간다는 건 성장의 연속이고 간단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관계와의 투쟁을 넘어서 삶의 불가해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파하는 일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전에 읽은 어떤 동화에서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가 밤이되면 저 별들이 내 머리위로 쏟아지면 어떡하지, 바다 끝까지 가면 밑으로 푹 꺼져서 죽게 되지 않을까 무서워서 머리를 싸매고 다녔다는 묘사가 있었다. 열 세네살짜라 그 아이의 인생과 고민도 어른들이 보기에는 사소해보이겠으나, 그에게는 얼마나 무지막지한 공포일까.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 개연성없이 일어나는 불행들. 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사실 얼마 되지 않고, 노력한다고 반드시 보상이 따라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평생가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타인도 그러할 것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억울하고 서러워 계속 우울했다.
왜 인생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일까. 왜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이토록 없는 것일까. 좋은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불쑥불쑥 찾아오고. 그렇다면 아주 가끔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기대하며 두려운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게 과연 맞는 선택일까? 아마도 열한살때부터 작년까지 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아 헤맸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업무 프로세스를 점검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연습하는데 결국 어떤 것도 왼전하게 해낼수 없다. 그렇다면 산다는 건 결국 나를 끊임없이 깎아내는 공회전에 불과하지 않을까? 연속된 실패와 불행은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수 이랑의 노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는 제목과 같은 가사로 시작하며, 중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느새 내가 묻지 않아도 그 대답을 알 수 있을만한 어른이 되어서 결국 내게 상처를 줬던 그 사건들은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걸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게되면…
알게 되면, 우리는 그제서야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원체 그렇게 흘러가니까. 좋은 일도 슬픈 일도 특별히 내가 못나서도, 잘나서도, 나의 가족이 죄가 있어서도, 없어서도 아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그냥 일어나니까. 여기엔 많은 사건들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끼던 후배가 어느 날 세상에서 사라진 것도, 며칠 밤을 함께 새워도 늘 즐거웠던 친구와 이젠 모르는 사이가 된 것도, 내가 짝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날 뿐.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이 사실을 알수 없다. 아무리 듣고 책을 본다고 해도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으니 무의미하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이란 결국 '미래'인 것이다. 진시황도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현실보다도 닥칠 '미래'가 두려워 그토록 불로불사를 찾아 헤맸고, 우리 삶에도 사실은 ~~할까봐 두려워서 일을 그르치고 괜히 싸우는 일도 어찌나 많던가. 과거는 지나간 것, 미래는 오지 않은 것.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현재 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막막하다. 안전하게 사랑받던 아이들도 결국 청소년이 되면 인간의 이 유한함과 무능을 직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생의 고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미 곱절의 삶을 살아서 '그냥 그렇게 고민하며 사는것' 이 아무 문제없다고 내가 백날 말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 막연한 공포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나역시 어린시절 어른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그냥 체크리스트를 적을 때 쓰는 노트를 하나 줬다. 그리곤 고민을 적어보라고, 고민을 왜 하는 건지, 뭐가 걱정되는 건지,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건지 아닌지 한줄 한줄. 내내 머릿 속에 들고다니면서 힘겨워 하지 말고 공책에 적고 그대로 잠시 둬 보라고. 나중에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있다가 다시 와서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별게 아닐 수도 있고 또 다른 답이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그러다가 이제 별일 아닌 것 같으면 쭉쭉 그어서 없애 버리라고.
더불어 시험을 못 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하루하루가 낭비되는 것 같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아냐는 말에 왜냐면 내가 그렇다는 말도 더해서.
'나도 학창시절 수학 점수를 30점까지 맞아 본 적이 있어, 근데 또 대학은 잘갔지. 근데 4년동안 미친듯이 공부해서 사무실 한칸에서 신발이나 닦으면서 일 못한다고 엄청 혼나고 또 혼났지. 그때 이렇게 살려고 그토록 열심히 살았나 후회 정말 많이했어. 그러다가 코로나 때문에 결국 회사가 망해서 하루아침에 잘렸지. 그렇다고 내 인생이 망했니? 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또 어딘가 이직했고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걱정하는 일이 전부 일어나도 사실 아무 상관 없는거야. 집에 불이 나면 인생이 망할까? 끄면 돼. 어딘가 신세를 질 수도 있고, 숙소를 구하든 이사를 갈 수도 있겠지.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그래서야.'
학생은 여전히 알듯말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도 집에 가야 했기에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수업 후 2시간이나 지나 지쳐있었다) 다행히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이제 성실하게 학원을 다니기로 나와 약속까지 했다. 집에 오는 길에는 비가 억수로 와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었지만, 집에 와 누우니 잘난척도 참 가지가지 했다는 생각에 불쑥 불쑥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좀 더 부드럽고 그럴듯하게 전할 방법은 없었을까? 솔직함은 내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해야 그정도 뿐인 거다. 내가 해봤는데 안죽더라. 함 해보실?
열 일곱살부터, 근 몇년전까지 시간이 되면 매주 또 여의치 않으면 가끔 심리상담을 받았다. 나의 오랜 선생님은 그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벌써 아는 걸 보면 지혜야 넌 참 똑똑해.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존재이기도 해. 우리는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티끌이니? 그러니 그토록 고민되고 걱정했던 일들도 사실은 별거 아닌 거지. 참 얼마나 신통한 일이니?' 그때는 내 고민이 별 거 아니지 않다고 투덜투덜 반박했지만, 이제와보니 참 별거 아니긴 하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얼마나 쉽지 않았던가. 많은 좋은 사람들, 경험이 쌓여 덜 무너졌던 날들, 또 집이 무너지고 단체로 욕을 먹어서 꾸깃꾸깃 집에 돌아와서도 어떻게든 나를 먹이고 입히던 내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그렇기에, 또 그래서 나는 사는 게 전처럼 두렵지 않은 것이다. 오늘도 어떻게 어떻게 또 살았으니까.
난 고작해 일주일에 한 번 보는 선생님이다. 학생 한명 한명에게 나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어른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국종 교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일은 아주 가끔 일어나고, 우리 삶은 수없는 슬픔으로 가득하기에 구내식당 메뉴가 맛있다는 이유 만으로도, 일상의 작은 선의와 행운에 감사하면서라도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내 무지막지한 슬픔과 서러움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던 언젠가의 선생님들처럼, 나역시 그애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다.
얼마 전 갔다온 옛 직장동료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당시 회사는 매일같이 사정이 안좋아서 하루아침에 팀장님이 잘리고 팀은 없어질 위기였으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침묵 속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뭐 기쁜 일이라도 없냐고, 없으면 좀 만들어 보라고 결혼은 안하냐고 서로서로를 그토록 갈궜다. (?) 그때 주로 갈굼 받던 이가 결혼을 해서 그 당시 점심 멤버들을 2년 후에 다시금 모이게 하다니. 참 신기하고 반가웠다. 난 신랑측에 사진찍을 사람이 부족하다고 난생처음 신랑 바로 뒤에 서서 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리며 우리가 이렇게 친했냐고 자조하듯 웃었다.(모두에게 최측근이라고 엄청 놀림을 받았다) 삶이 참 그렇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하고 사소하기도 하고. 그래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