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목재에서 문재, 트레킹
지난 3월 중순 경 갔을 때는 발목 위로 차오른 눈 때문에 생고생을 했다. 그 숲길의 평균 고도가 900미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봄을 만나러 갔는데 겨울과 혹독하게 싸우고 온 꼴이었다. 그래서 녹음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가서 나를 괴롭혔던 그 길을 만나고 싶었다. 당시는 경황이 없었던 탓에 주변 경관에는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일정 때문에 미루다 일주일 전에 드디어 둔내행 KTX를 예약했다.
▲들어가는 길 ⓒ 안호용관련사진보기
지난 14일, 둔내역에서 택시를 타고 성목재 마루에서 내렸다. 넘어가면 평창군 방림면이 나오고 더 남쪽으로 가면 영월이 나온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면 메밀의 고향 봉평과 만난다. 이 고갯길은 남쪽의 문재와 더불어 횡성과 평창을 잇은 옛 고개이다. 첩첩산중 강원도 심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슬비였다. 10월 들어 가을 장마처럼 거의 매일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아침부터 비가 그쳤는데 생각지도 않은 보슬보슬한 빗방울이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지대여서 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였는지 모른다. 아무튼 트레킹이 편치 않을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배낭과 행색을 추스른 나는 숲길로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설렘보다 담담함이 앞섰다. 지난 3월에는 초입부터 눈길이 펼쳐졌는데 지금은 갈변하는 녹색길로 대체되어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던 지난번이었다면 오늘은 비에 푹 젖은 가을 풍경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잠시 겹치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과거의 기억은 멀리 사라졌다. 완연하게 익어가는 가을 속으로 빠져들었다. 숲길은 투박했다. 녹음은 시들어가고 이미 황갈색 낙엽을 뿌려 대는 나무들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아마도 일주일 후면 숲길의 색감은 사람의 눈길도 받지 못하며 추레 하게 변할 곳이고, 일주일이 더 지나면 마지막 1년의 생을 접고 겨울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관심에서 벗어난 숲길을 나는 걸었다.
완만한 경사 길을 벗어나 능선 마루금을 향해 짧은 된비알을 치고 올랐다. 다행히 이슬비는 멎었고 여전히 하늘은 잿빛이었다. 가쁜 숨을 쉬며 능선에 당도하자 시야가 트였다. 넓은 조림지가 능선부로 펼쳐져 있었다. 벌목하다 살려둔 키 큰 말랑깽이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목과 조림이 이어지던 당시 수많은 산판 차량들이 다녔던 탓인지 아직도 당시의 살 풍경이 숲길에 남아 있었다. 그 길은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굽이쳐 이어졌다.
▲조림지 ⓒ 안호용관련사진보기
조림지 능선 경사면에는 손가락 굵기 만한 침엽수 묘목이 지지대에 달라붙어 빼곡히 심어져 있고, 더 가자 심은 지 몇 년 된 것 같은 무릎 높이만 한 소나무 군락이 능선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조림지에서는 누렇게 변한 싸리나무가 그곳을 잠식하고 있었다. 생명력 강한 싸리나무는 이 숲의 상위 포식자처럼 지천이었고 이젠 조림지까지 침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림 지역을 벗어나자 능선 안부는 고도를 높이고, 숲 길은 하늘과 차단되면서 경사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난 봄 러셀(눈을 헤치며 등산하는 것)을 하던 곳이었다. 그늘진 고갯길이라 3월 중순임에도 눈은 겨우내 해빙되지 않고 있어 무릎까지 빠졌다. 잠시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저 고개를 넘어 능선을 돌아선다면 다시 양지 바른 길이 나온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낙관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나는 나를 믿었다.
▲쓰러진 나무 ⓒ 안호용관련사진보기
이른 점심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 비에 습지로 변한 길을 지나 경사면을 오르고 있을 때 법면에서 넘어진 거대한 참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다. 이 부근 수목 중에서 상당히 큰 부류에 속하는 나무였다. 아마도 이번 여름에 약한 지반에서 근근이 버티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뿌리를 들어내며 통으로 쓰러진 것 같았다. 사바나를 호령하던 수사자의 말로를 보는 것처럼 참나무는 처참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너는 어찌하여 그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가. 길바닥에 무너져 있는 참나무 줄기 사이를 비집고 조심스럽게 밟으며 지나갔다.
이제 숨 막힐 것 같은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몇 년째 한 번도 깎지 않았을 것 같은 웃자란 갈변 수풀이 수북하게 길을 완전히 덮고 있었고 갈색으로 물든 싸리나무 가지가 팔등을 계속 스쳤다. 때로는 보잘것없는 풍경 사이로 진한 연지를 바른 것처럼 새빨갛게 물든 앙증맞은 이파리들이 나를 유혹했다. 손으로 잡히지 않는 높이에서 농염한 눈빛을 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홍일점 같은 단풍은 발걸음이 무거워질 만하면 내 앞에 나타났다.
얼마쯤 갔을까, 아마도 3시간 이상 걸은 것 같다. 다시 이슬방울이 안경에 맺혔다. 안경을 닦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슬은 체온으로 마를 수 있지만 수풀은 다시 젖어 마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등산화와 바지 밑단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스틱으로 발을 덮는 수풀의 이슬을 털어내며 앞으로 걸었다. 우거진 수풀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튀었다. 오래된 등산화의 방수층은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절개지 ⓒ 안호용관련사진보기
문재 옛길에 닿으려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산등성이는 한층 높아지고 계곡도 깊어지고 있었다. 도끼 자국처럼 날카로운 깊은 계곡이 산속 깊이 이어졌다. 산등성이는 가팔라지고 절개 면을 따라 길은 계곡 깊이 이어졌다. 화려하지 않지만 제법 단풍도 들었다. 암산 능선부에는 키 작은 침엽수들 사이로 다양한 단풍이 시선을 잡았다. 계곡에 이르자 폭포처럼 우렁찬 소리를 토해내며 힘찬 물줄기가 낙하하고 있었다. 이번 가을장마 때 품은 물을 모조리 쏟아내려는 기세이다. 임도 숲길에서 이런 비경을 보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잠시 그 풍경과 함께 했겠지만, 아쉽게도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계곡을 빠져나온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곧이어 옛 문재 마루가 나를 반겼다. 이제 임도 구간이 끝난 것이다.
문재는 조선시대에는 독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엔 중요한 관로로, 서울과 관동을 잇는 지방도로였다. 지금은 발 아래에 문재터널을 뚫고 인천에서 동해까지 연결한 국도 42호선이 지나간다.
아주 오래전 방황하던 시절, 젊은 날의 초상의 주인공처럼 삼척에서 버스를 타고 홍천으로 여행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마고도 같은 험준한 산악도로를 금방이라도 퍼질 것 같은 버스가 먼지를 펄펄 날리며 힘겹게 달렸다. 삼척에서 홍천까지 가는데 종일 걸렸다.
▲문재 명품 숲길 ⓒ 안호용관련사진보기
지자체에서는 옛 고갯길을 잘 다듬어 소나무와 낙엽송이 어우러진 테마 숲길을 조성해 놓았다. 날 것의 옛길은 깨끗하고 고즈넉했다. 높지 않은 능선부 숲에도 길을 내어 충분한 숲길을 제공하고 있다. 나중에라도 격렬한 트레킹 공간에서 벗어나 친구나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걷고 싶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지친 몸을 다독이며 여유롭게 문재를 걸어 상안리로 내려갔다. 가을 풍경 속에 잠겨 있는 마을을 지나 횡성으로 가는 버스 종점에 도착했다. 버스 올 시간이 많이 남았다. 먼산바라기로 텅 빈 정류장 박스를 지키고 있었다. 건너편 능선에 내가 지나온 문재길이 숲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다. 자동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모든 게 적요에 쌓여 있었다.
19킬로미터에 이르는 지나온 긴 여정이 잠깐 기억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지난 시간은 그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길게 이어질 것이다. 아직도 가야 할 시간은 넘쳐 나고 수많은 곡절이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집에 가기엔 아직도 멀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리듯 버스를 기다렸다.
*오마이뉴스에도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