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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y 29. 2020

또 다른 길을 향해

숲과 흙길 그리고 침묵이 있다면...

나는 한때 산에 미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산에 대한 애정은 항상 변치 않았다. 때론 격렬하게 때론 담담하게 때론 격조를 감수하면서 많을 시간을 보내왔다. 몇십 년 동안 관계를 맺어 왔으니 수많은 애증이 쌓여 있을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었기 망정이지 사람처럼 움직였다면 절교했을지도 모른다.     


산에 미쳤다고 하는 것은, 해외 원정을 가고, 메이저 산악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행위를 보고 그 척도를 측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산에 대한 알피니즘적 믿음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산을 흠모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산에 대한 뜨거운 연정은 알피니즘을 도외시하고서는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할 뿐이다. 산의 사이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피니즘적 관계의 깊이가 중요하며 그것이 속된 말로 미쳤다고 농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든 작든 그러한 열정적 등반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격렬하게 산에 오르므로 해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충족감은 결국엔 욕망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욕망의 수치는 더욱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친 듯이 산에 오르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곡절들이 결국엔 욕망화 되고, 절제를 잃고 더욱 추구하게 되며,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어느 날 발견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등골이 오싹해지는 고립감을 수없이 경험했으면서도 다시 산으로 향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욕망이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산에 대한 탐욕이었는지 모른다.      

현리 마일리 국수당 / 연이산 들머리


2년 전이었다. 수십 년 동안 임자를 잘못 만난 탓에 몸이 사달이 나고, 삶의 고단함에 지쳐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바오로의 회심처럼 어떤 밝은 빛이 머리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어떤 계시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산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산엔 봉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봉우리를 목표로 등산하는 것도 하나의 완성된 등정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충족된 목적을 얻을 수 있었다. 봉우리를 탐하지 않더라도 산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유레카! 였다.     


높이가 좀 되는 산에는 산림청이나 지자체에서 유지 관리하는 임도가 있다. 산림의 전반적인 관리나 산불 예방 진화 등의 목적으로 관리되는 비포장 임도는 돼지창자처럼 산허리를 끼고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오래전에 땔감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산판길과 마을을 연결하는 고갯길을 다듬고 확장하고 연장하여 현재의 임도를 완성한 것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런 임도는 주변에 상상외로 발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운동가들이 가끔 그 임도를 자연 훼손의 주범으로 비판을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한 소리이다.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환경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없다고 산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산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최소한의 손길이 필요하며, 결코 방치한다고 해서 환경보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방치보다 최소한의 관리가 지혜로운 행위라는 말이다.     


하여튼, 그렇다고 임도들이 자동차 전용도로처럼 전부 집중적으로 관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사태, 도로 유실, 배수로 등을 꾸준하게 유지 보수하여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는 구역도 있고, 사람 손이 덜 타 오지처럼 풀이 무성한 구간도 있으며 또한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아 수풀로 덮여있는 폐임도도 있다. 가평 귀목봉 장제울 기슭의 어느 임도는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잠시 폐쇄된 공간에서의 두려움도 즐길 수 있다.     


임도의 주목적은 산림 관리이지만, 지자체에 따라 산악자전거용으로 개방하기도 하고 둘레길 개념의 도로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엄격하게 등산객을 통제하는 곳도 있지만 그런 곳은 극히 일부이고 대게의 임도는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등산로와 접하고도 있어 잠시 쉬어가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현리 국수당에서 오른 우정고개

사실 임도는 산악인이나 운동 삼아 산을 찾는 등산객에겐 매력적인 코스가 아니다. 계곡이나 능선에서 즐길 수 있는 비경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의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악산으로서의 코스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산길, 그런 길이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산허리를 끼고 굽이굽이 돌고 돌뿐 그 어떤 드라마틱한 상황이 연출되지도 않는다. 텅 빈 산에서 적막과 싸우며 지루하게 걷고 또 걸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엔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목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소리도 없고, 터질 듯 한 대퇴사두근과 비복근의 긴장감도 없고, 탁 트인 멋진 조망도 없고, 시원한 계곡물에 머리를 담글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 지루하고 평탄한 길도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숲과 흙길 그리고 침묵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준다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일상에 찌든 영혼의 안식처로서 그리고 명상가적인 어떤 삼매의 장소로서 혹은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는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 나는 그곳을 과대 포장하지 않는다. 그 어떤 철학적 사유도 배제한다는 것이다.     


임도나 산판길이나 고갯길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리고 그 길을 인공적이든 자연발생적이든 그것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숲이 있고 흙길이 있으면 나는 걷는다. 침묵이 거기 있다면 기꺼이 반긴다.      

연인산 임도 용추계곡 구간


참 긴 시간이었다. 요즘 군대에 비교하자면, 고작 2년 군대 생활하고 몇십 년을 우려먹는데, 30년 동안 산에 다녔으면 대대손손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산악회원이나 산꾼들 몇 명이 만나면 대화의 90% 이상은 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무용담의 거개는 죽다 살아온 경험담이다. 그들은 사지에서 살아왔노라고 외친다.     


한겨울 20킬로가 넘는 백패킹 배낭을 짊어지고 화엄사에서 시작해 노고단에 올라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겪었던 무용담, 설악산 토왕성 폭포를 거처 화채능선을 등반하면서 몇 번은 죽었고, 한여름 동대산과 노인봉을 거쳐 소금강을 내려가면서 물과 어둠과 졸음과 사투를 벌였고, 북한산 코끼리 능선 빙벽에 매달려 천당을 몇 번 오고 간 긴박한 상황 등등...         


하지만 그런 고통의 순간은 마약과 같아서 다시 산을 찾게 되고, 그것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반복된다. 산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그 힘든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지만 당사자들은 고통의 미학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 신념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며 거친 숨이 목까지 차오를 때나, 험한 바위를 기어오를 때 묘한 희열을 느껴보았다면 당신은 산에 중독되었다는 증거다. 인간의 원초적인 고통과 희열의 충돌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충돌을 의미하며 그것은 억제된 엑스타시를 양산한다. 하여 산은 이성적인 사고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갈 수 없다. 칸트 형 인간은 그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추계곡 상류


그렇다고, 그런 등반의 미학이 없다고 해서 산은 출입증을 교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웃도어가 인간의 본성 즉 야성 표출의 한 수단이라고 할 때, 산은 자신에게 호혜 관계를 표하는 호의적인 인간의 출입을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과 격렬하게 애정표현하는 산꾼을 더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숲길을 목적 없이, 그저 단순히 걷기만 하는 산객에게 티켓 발부를 마다하지 않는다. 산은 알고 있다.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산객의 발소리를 들을 때 산은 이렇게 말한다. '그려 오늘도 한번 욕봐라...'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봉우리를 오르겠다는 압박감은 이제 없다. 물론 정상을 탐하지도 않는다. 자유롭게, 등산화를 동여매고 집을 나서 전철을 타고 혹은 버스를 타고 그렇게 산으로 들어가는 거야. 단순하고 느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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