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으로 떠난 어느 날의 소소한 기록
엄마의 생일 아침. 아빠가 끓여준 미역국과 어느새 (아마도 지난 주말) 엄마가 잔뜩 담가둔 겉절이, 동치미, 깍두기와 밥을 먹는다. 미역국은 엄마의 생일을 위한 것. 미역국을 귀찮게 왜 끓이냐며 투덜대던 엄마는 무척 맛있다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먹는다. 역시, 좋아할 거면서. 남이 해주면 튕기지 좀 말고 그냥 순순히 좋아하라고 핀잔을 주려다 그만둔다.
생일파티는 어젯밤 나의 강행으로 미리 치러졌다. 12시가 지나자마자 축하한다는 인사도 새삼 건넸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이만하면 서운하지 않게 딸 역할은 했다는 약간의 오만함. 오늘 부산에 가기 위해 나름의 공을 들인 결과다.
차를 급속 충전기에 꽂아두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내 차는 전기차다) 립글로스를 바를 때가 되니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린다. 타이밍이 좋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향해 내달렸다.
서울과 대전을 매주 왕복하고 있는 처지라 대전에서 부산도 별거 아니란 생각으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거리가 두 배다. 지리 감각이 이렇게나 없어서야…. 그래도 가을이 되어 여기저기 불긋해진 산을 보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고, 다행히 길도 막히지 않아 운전이 즐겁다.
그래도 역시, 멀긴 멀다. 전엔 어떻게 서울에서부터 차를 끌고 갔던 거지? 친구가 있어서 좀 나았나? 그래도 슬슬 지루하다고 생각할 쯤 부산에 진입한다. 진입하는 순간 도로가 참 황당하게도 나 있다며 웃음을 터뜨린다.
충동적인 여행이다. 대학원 동기가 출장 겸 부산에 온다길래 슬쩍 그 자리에 끼기로 했다. 혼자 부산을 누비다가 일정이 끝난 동기와 만나 술 한 잔을 하기로. 저녁 술자리를 위해 예약해 둔 이자카야 말고는 아무 계획도 없는 여행.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근처에 계신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드릴 때까지도 아무런 계획이 없다가, 언젠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카페로 향한다. 가까운 줄 알았더니 걸어서 40분 거리. 지리 감각이 이렇게나 없어서야….
그래도 제법 마음이 여유롭다. 낯선 곳을 누벼도 보폭을 맞춰야 할 누군가가 없으니 발걸음은 한없이 느렸다가 쓸데없이 빠르기를 반복한다. 헤매도 탓할 사람이 없으니 안심이다. 지도 앱이 안내해준 덕분에 길은 금방 찾는다. 고심 끝에 주문한 케이크와 커피. 맛이 아주 좋다. 왠지 이번 여행의 운이 아주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카페에 앉아 일이나 할까 해서 태블릿을 챙겨오긴 했지만, 막상 자리에 앉으니 일할 생각은 모두 사라진다. 그래. 놀러와서까지 무슨 일이람? 산더미같이 밀려 있는 일들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애써 외면한다. 그럴 바엔 다음 목적지나 찾아보기로 하고서 이것저것 뒤져본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 다시 오면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해뒀던 책방이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다. 또다시 버스는 애매하고, 걷기엔 다소 먼 거리. 그냥 걷기로 한다. 날이 좋아 다행이다.
한참을 걷고, 그러다 다리를 건너기엔 아무래도 불안해서 버스를 두 정거장 정도 탔다가 다시 걷는다. 어두운 골목에 따뜻한 불빛을 비추고 있는 목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늑하고 조용한 책방. 음료와 책 대여비를 결제하고 책장을 본다.
아—무 생각이 없다. 사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불쑥 책장의 책을 꺼내 몇 페이지만 보아도 나와 맞을지 아닐지 알아보는 안목 같은 건 없다. 맛집을 찾는 안목은 있는데 말이지. 뭔가 거창한, 나에게 깨달음을 줄 것 같은 제목의 책에 손가락을 뻗어본다. 그러다 문득, 그 옆의 얇고 간소한 제목의 책에 시선이 꽂힌다. 이걸로 할까? 잠시 망설인 뒤 뽑아본다. <일기日記>.
소설가의 에세이. 모르는 작가다. 그래도 일기를 어떻게 에세이로 풀어냈을까 궁금해서 펼쳐 들었다. 느릿느릿 읽어보니 과연 소설가의 문장이다. 일상에서 머리로 떠밀려오는 온갖 생각과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그것이 없어도 일과를 풀어내는 그 자체가 멋진 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글을 이렇게 한 번 써볼까? 다이어리를 펼치고, 펜을 집어들었다.
최근 일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탓인지, 아니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지 또다시 글이 안 써진다. 글이 안 써진다는 글만 몇 번째 쓰는지, 이젠 안 써진다는 이야기로도 글을 쓸 수가 없어 아예 펜을 놓고 말았다. 나의 경우는 자판을 놓았다고 하는 쪽이 더 알맞겠다. 자꾸만 뭔가 메시지가 있어 보이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아 에세이조차도 쓸 수가 없었다. 아,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은 들지만, 나쁘게 들어버린 습관은 좀처럼 버리기 힘들다.
떠돌다 들린 책방,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방법을 찾는다. 이런 건 어때? 책이 모범 답안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답지를 본 학생은 비로소 막힘없이 글을 적어 내려간다. 어느새 다이어리 한 페이지가 가득 찼다. 소설 쓰듯이 내 하루를 돌아보기. 내가 찾은 방법은 이쪽이다. 또 막힌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 또 정처없이 떠돌아야겠지만.
책은 고작 한 챕터를 읽고 덮었다. 웨이팅을 걸어둔 식당에 가야 한다. 대기인원이 어마어마하던 돈가스집.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겠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한 입 먹고는 헛웃음을 터뜨린다. 개쩐다, 이거. 냉큼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아, 역시. 이번 여행은 운이 아주 좋게 흘러간다.
홀로 식사를 즐기고, 이번엔 떠들썩한 술자리로 향한다. 이자카야는 역시 내가 찾은 곳인데, 음식도 술도 모두 맛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어깨가 으쓱해진다. 봐라. 내가 책 보는 눈은 없어도 맛집 보는 눈은 있다니까? 뿌듯해진 기분으로 술을 마시자니 쑥쑥 잘도 들어간다. 입도 술술 열린다.
썩 괜찮은 하루다. 꼭 일기를 써야겠다 싶을 정도로. 일기도 보여줄 만한 글이 될까 싶어 잠깐 만났던 책의 모범 답안을 살짝 따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