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꾸가 취미인 건지 사는 게 취미인 건지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다이어리가 출시되기 시작하더니, 이젠 온갖 알고리즘이 내게 다이어리를 보여준다. 나에겐 작년부터 잘 써오던 다이어리가 있는데. 내년에도 이걸 그대로 쓰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새로운 건 사지 않기로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결제 문자가 날아와 있다. 이러고도 자꾸만 쇼핑몰을 뒤적거린다. 연말마다 반복되는 연례행사다.
다이어리를 쓰고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워낙 게으르고 변덕이 심한 탓에 매일 꾸준히 쓰는 습관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끄적거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 휩싸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스티커를 골라 붙이고 깔끔하게 글씨를 쓰고 나면 밀려오는 뿌듯함이 좋다. 펜을 잡고 아무거나 끄적거리다 보면 불현듯 머리가 맑아지며 막힘없이 술술 써지는 기묘한 감각도 좋아한다. 우울함을 펜 끝으로 마구 배설하고 난 뒤의 후련함도. 펜을 꼭꼭 눌러 쓰고 나면 오돌토돌해진 종이의 뒷면을 만지는 것도.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지, 다이어리 종류도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전엔 11월쯤은 되어야 새해 다이어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이젠 10월부터 어서 내년을 준비하라고 떠미는 듯 다이어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다이어리를 구경하는 것도 제법 즐거운 일이다. 이런저런 다이어리를 많이 써봤더니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깐깐하게 상품페이지를 살핀다.
표지가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고른다. 상품페이지를 휘리릭 넘겨 페이지 구성을 먼저 살핀다. 위클리 페이지가 가로로 길쭉한 형태면 아웃. 위클리 페이지에 보통 그날의 할 일을 적는 나에겐 세로로 긴 형태가 더 유용하다. 다이어리의 섹션이 다양하게 구성된 것은 좋지만, 내가 잘 쓰지 못하는 섹션이 너무 많은 것도 패스. 괜히 다 채워야 할 것 같다는 압박 때문에 다이어리 쓰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계부 파트가 있는 다이어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한창 만년필에 빠져있을 땐 종이도 깐깐하게 살피곤 했는데, 이건 슬슬 포기했다. 만년필 잉크를 잘 견디는 종이를 찾다 보면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지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는 필감이 좋은 펜을 쓰고, 대신 만년필로 끄적거리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필사용 노트를 별도로 구매했다. 요즘엔 만년필 세척이 귀찮아 한동안 만년필을 찾지 않고 있으니 노트를 분리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고민되고. 한참 따져대다가 아예 불렛저널 형식으로 갈아타 보기도 했다. 일정 간격으로 도트만 찍혀 있는 빈 종이에 내가 직접 칸을 그려 넣어 쓰다 보니 자유롭고 편해서 꽤 오래 사용했는데, 어느 순간 매달 칸을 그려 넣고 새롭게 다이어리를 꾸며야 하는 것이 벅차서 그만둬버렸다. 그래도 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건 참 좋았는데.
그래서 이번엔 속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형태로 바꿨다. 육공 다이어리는 다이어리 바인더가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불편했는데, 버섯 노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다이어리가 있길래 구매하고 한참 잘 쓰고 있다. 속지 종류도 다양하고, 뭣보다 일반 육공 다이어리보다 훨씬 얇고 가벼워서 좋다. 이미 쓴 페이지는 따로 빼둘 수 있으니 얇고 간편하게 유지하기도 좋고.
속지만 갈아 끼우면 되겠다, 이걸 내년까지 쭉 이어서 써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걸 어쩌나. 요즘엔 이전 기록을 바로바로 찾아볼 수 없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두꺼운 노트 형태의 다이어리가 그리워진다. 다시 불렛저널로 갈아타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새로운 노트를 또 사버렸다. 이번엔 진짜로 안 사려고 했는데. 그리고 사실, 탐나는 노트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다이어리를 쓰는 것보다도 사는 것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소비… 괜찮은 걸까? 이번엔 꼭 다이어리 한 권은 끝까지 다 써야지. 매번 앞부분만 쓰고 남은 것을 쌓아두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니까. 다이어리를 고르고 나면 꼭 내년 한 해는 올해보다 더 성실하고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오만이 생긴다.
이 기분까지도 다이어리를 쓰는 즐거움 일부가 된다. 사실 기록하고 무언가를 남긴다는 목적보단 그냥 고르고 쓰는 행위 자체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어찌 되었든, 즐겁기만 하면 된 거겠지. 다이어리를 고르고 났더니 이제야말로 연말이 와버렸다는 실감이 난다. 새 다이어리엔 어떤 이야기가 적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