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뒤 불 꺼진 집안에서 잠시 조용히 누워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은 하루를 정리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아 뭔가를 하기 싫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라앉은 몸을 추슬러 문을 나서는 일은 매번 사소한 결단을 요구한다. 어쩌면 우리 동 사람들이 계단 오르기를 시도는 해보았으나 꾸준히 지속시키지 못하는 원인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매번 그 사소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지점까지 생각을 확장시켜보면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11층에서 사시는 주민께서 따님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 11층까지 일단은 단 한번이라도 해보겠다고 말씀하신다. 계단을 오르는 분들의 저변확대는 우리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다. 독려를 해드렸다.
쌀쌀한 공기에 맞는 복장으로 며칠 전부터 아주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계단을 오른다. 평상시는 거의 입을 일이 없는데 계단을 오르는 데는 이 옷이 아주 유용하다. 계단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땀이 배출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무래도 반바지는 이제 무리다. 적당한 체온을 유지하며 운동하는 것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천천히 옮겨놓는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움직인다. 코로나 이전에는 모든 일상의 움직임들이 바빴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뭔가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량에 집착하고 한 세트당 랩타임이 얼마인지 체크하는 등 속도에 집착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일들을 덜어내면서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일상이 재편되고 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데 이만한 운동이 있나 싶다.
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은 이미 우리 일상 속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켜왔다. 로봇, 인공지능, 블록체인, 퀀텀 컴퓨터, 3D 프린팅, 첨단 소재와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되고 있는 기술적 발전과 그로 인한 삶의 변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흔히 인공지능 하면 먼 나라 얘기 같지만 매일매일 쓰는 내비게이션만 하더라도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상에 일으킬 변화와 나의 삶에 일으킬 변화가 어떤 것일지 생각하는 가운데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혁명, The Next>의 메시지를 생각해본다. 다행히도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기술적인 부분에 한정되지 않아 나를 안심시켰다. 기술적 변화는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사람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나는 읽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이 변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준비할 네 가지 것들을 얘기한다.
‘상황 맥락 contextual 지능(정신)’은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일들 간의 상호 연관성을 잘 파악하고 인지한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서 emotional 지능(마음)’은 생각과 감정을 잘 정리하고 결합해서 자신과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말한다. 특히 스스로 감정적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은 핵심적인 개념이다. ‘영감(inspired) 지능(영혼)’은 변화를 이끌고 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역량인데, 그렇게 하자면 타인과 공유하려는 생각과 뚜렷한 자신의 목표와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신뢰가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체(physical) 지능(몸)’은 특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다. 앞으로 세상은 우리가 서두르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할 것이며, 그것이 개인의 삶과 우리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거기에 적응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신과 주변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 네가지 지능은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코로나와 디지털 전환에 맞는 일상의 생활방식으로서 나는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의 덕목을 계단을 오르며 기르고 있다. 감정적 변화와 환경의 변화가 나에게 가해지는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회복탄력성 역시 계단을 오르며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는 지점속에서 수시로 획득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나를 유지하는 깨달음과 에너지는 한순간에 발견하고 한 번으로 채울 수 없다. 매일매일의 사소한 결단과 매일매일의 마음가짐과 몸가짐, 매일매일의 생각과 반성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내디디며, 지나간 변화의 패턴을 생각해보고 현재 겪고 있는 변화의 속도를 느끼는 것으로 앞날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덧붙여 클라우스 슈밥은 릴케의 시 문구인, "미래는 우리 안에서 변화하기 위해 훨씬 전부터 우리 내부에 들어와 있다"를 인용했다. 그의 말에서 보듯 변화가 갑자기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은 내가 좀 더 안심하며 생각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더불어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인류 시대(human age)로써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모든 생명유지 시스템을 형성하는 제1세력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 시대의 시작도, 끝도 모두 우리가 이끌어내는 이야기며,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일상으로 옮겨오면 어디 잠시 잊거나 뒤로 빼돌리거나 미루어 둘 수 없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몸이 작동하는 원리를 스스로 살펴보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관찰을 통해 얻은 의문이나 깨달음을 이와 연관된 콘텐츠를 공부하면 일상생활을 사는 지혜는 더 늘어나고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내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의료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스스로 몸을 챙기는 건강한 습관을 갖지 않고 그 많은 일들을 약이나 기계에게 의존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덧붙여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도 관찰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대지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명료한 머리로 그 관찰한 바의 패턴을 일상처럼 살펴보는 지혜도 역시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구체화시켜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실천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근육과 실행하는 근육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실천하지 않고 공상만 하고 공상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내가 그것을 잘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상을 즐기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관심사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는 상관없이 자신을 포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두 발을 대지에 단단히 자리잡지 않고 10센티미터쯤 떠서 산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위선적인 삶이 그곳에 숨어있다. 안타깝게도 그 유혹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잠깐의 비난이나 매서운 눈초리가 있더라도 사람들은 금방 잊는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공상에서 조금씩 벗어나 곧바로 실행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되면서 서서히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이 조금씩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에 옮겨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기한 이 변화를 이끌어준 계단은 내가 살고 행동하는 도처에 있다. 지하철에서 일하는 건물에서 그리고 내 삶의 터전인 집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나는 느긋하게 곧바로 실행하는 힘의 근육을 매일매일 기르고 있다. 땀에 흠뻑 젖은 점퍼를 끝까지 입고 있었다. 땀을 흘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찝찝함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계단 창문을 하나씩 닫으며 이 깊어가는 가을에 아주 조금 더 깊어갈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210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