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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04. 2020

2018년 겨울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2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밤새 버스로 8시간을 달려온 딸아이를 아침에 맞았다. 그 큰 트렁크를 낑낑거리고 끌고 다녔다니 안쓰러움과 대견한 마음이 교차한다. 아이가 떠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이 앞섰다. 한국 학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라 잘 도착은 했는지, 잘 적응할 수 있을는지 궁금한 시간들이 서서히 지나가고 무딘 시간이 다가오자 잠시 잠깐씩 잊고 지냈다. 그즈음 나도 평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편견들을 던져버리게 되었다. 여자가 혼자 외국에 나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 사이 딸은 주말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와 러시아, 심지어 모로코도 다녀왔다고 했다. 학생이라 비행기 티켓 값이 싸기 때문에 유럽을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방학을 즈음해서는 40페이지 정도 되는 리포트도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고 했다. 


한결 대견해진 딸아이를 보는 순간 안도하고 오늘 소화할 일정을 그려보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계획은 세웠지만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게 싫어 당일의 각자의 컨디션과 의견을 조율해 움직이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차량을 타지 않고 걸어서 움직이자고 했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 바르샤바도 구도심과 신도심이 연결되어 있어 그 각각을 보는 재미가 있다. 매력은 아무래도 구도심에 있지 않을까? 메트로폴 호텔의 조식은 아주 훌륭했다. 특히 절인 음식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오이와 토마토 등 채소는 신선했으며, 베이컨의 상태도 좋고, 적양배추를 소스에 갈아놓은 것도 아주 좋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식사에서도 등장했다. 그리고 이 붉은 양배추 맛이 아주 매력적이다. 생채소가 아니고 살짝 익혀서 갈아놓아 먹기에 아주 편했다. 독일 배추요리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고등어 비슷한 생선을 대여섯 조각은 먹은 것 같다.  

아침에 우리가 갈 곳은 바르샤바 국립미술관. 시간이 되면 전쟁박물관도 볼 터이다. 박물관 오픈 시간이 10시라 그전에 박물관 앞 숲길을 산책했다. 눈 내린 숲을 걷는 기분은 남달랐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과 아내가 걷는 모습이 참 예뻤다. 이제는 다정한 친구 같은 모습이다. 미술관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만든다. 회화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그림 안의 세상은 내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시공간이 완전히 다른 세계다.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즐거움 앞에서 설렐 수밖에 없다. 오늘은 특히 중세 종교 작품에 대한 특별전시회를 같이 연다고 하니 더더욱 기대가 된다. 종교문화는 인간이 만든 문화적 양식의 결집체이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종교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무게감 있고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톨릭과 신교 중심의 기독교는 그 문화의 중심이고 그 속에서도 예수와 성모 마리아는 가장 중심에 있다. 최근 <Zealot>이라는 책에서는 예수가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나 역시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다.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연민 혹은 자비, 동정심을 뜻하는 용어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예수의 삶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소수자의 편에 서서 율법과 교조주의로 무장되어 윽박지르는 사람들과 맞선 삶이라고 단순화하면 이 비극적인 장면이야말로 가장 극적으로 사람들을 울린다. 이 모습에서 나는 지난 역사 속에서 아들을 전장에서 잃은 수많은 어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노동현장 혹은 노동운동 현장에서 아들을 잃은 수많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작품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당연히 아니지만 예술작품은 때로 권위 있는 해석과 유려한 문구와 식간을 벗어나 평범한 직관과 감각의 영역 속에서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그림들은 회화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잠시 잠깐이지만 나는 그 그림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구하고 실제로 그림들은 나에게 무언의 안식과 평화를 준다. 그 그림은 어느 순간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노력과 공을 들였음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더욱 그렇다. 이름이 알려진 화가의 그림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림들은 그 화가가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고 인내하고 환호한 그 모든 순간들을 모아놓은 흔적들인 것이다. 어떤 대화도 그림은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그림들은 나에게 합당한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나와 그림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모든 그림들이 아름답다. 시간이 아쉬울 뿐이다. 

 어제 길거리에서 보았던 가게의 도자기는 전주에 불과했다. 미술관에서 접한 도자기들의 색감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저 빛깔은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온 것일까? 약간 신비스러운 느낌마저도 든다. 조선의 백자와 고려의 청자는 은은하고 깊이 감도는 빛깔이 사람의 마음을 저 밑에서 서서히 끌어올린다고 하면, 여기 도자기들은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화려한 빛깔에 걸음을 뗄 수 없다. 그런데 모든 작품들이 하나 같이 다 시선을 떼기 어렵다. 오늘만 날은 아니지만 아쉬움을 사진에 담는다. 이곳은 모든 작품을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휴대전화의 카메라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겨우 아쉬움을 간직하며 길을 나선다. 쇼팽 박물관을 향한 발걸음이 가볍다. 발길 닿는 대로 시간가는대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그렇게 걸어간다. 


폴란드와 쇼팽은 어쩌면 이들에게는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쇼팽 박물관은 아담하고 1층과 2층에 그의 콘서트 안내벽보와 악보,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의 모습과 그들과 나눈 편지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위대하다. 1989년 눈 내리는 겨울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처음 크롬 테이프로 처음 들었다. 당시의 강렬하면서도 인상 깊은 선율은 여전히 내 귓가와 가슴을 울린다. 곡은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리 들린다. <영웅>을 비롯해 몇몇 곡들은 그 제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 알지는 못했다. 그가 7살에 폴로네즈 B flat과 G minor를 작곡했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그런 스토리를 읽고 들으니 음악이 완전히 달리 들렸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음악에 대한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알고 듣는 것이 모르고 들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감흥이 온다. 음악감상실에서 각각의 곡에 얽힌 이야기와 그의 연주를 듣노라니 대부분의 연주들이 새롭게 들렸다. 특히 아주 어린 시절 작곡했던 폴로네즈 곡부터 시작해서 연습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곡들을 듣고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마도 쇼팽 박물관에서 쇼팽의 연주를 듣는 약간은 우쭐한 마음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쩌랴 이렇게 좋은 것을.... 이제는 열정이 약간은 식었지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베토벤이나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악보를 도서관에 가서 직접 보기도 했다. 물론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지만 그래도 감흥이 있던 대목들의 주제부는 직접 찾아보고 뭔가 또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은 오히려 곡을 둘러싼 스토리가 그 음악을 더 잘 감상하도록 하는 것 같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그의 레퍼토리를 다양한 음악가를 통해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지만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고 나니 시장기가 밀려왔다. 폴란드 전통음식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중에 한 곳을 정했다. 식당 메뉴판에 친절하게 그림이 나와 있어서 선택이 어렵지 않다. chlodnik는 수프인데 싱싱한 야채 향이 그득하고 따뜻했다. 굴로쉬 수프와는 완전 다른 맑은 질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피에로 기라는 폴란드 만두는 전혀 낯설지 않은 친숙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제 먹은 맥주와는 달리 오늘은 폴란드에서 유명한 Zywiec(즈비에체)를 마셨다. 아주 매력적인 맛이었다. 맑고 시원하고 약간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질감이 단번에 좋은 맥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효모가 살아있다고 표현하면 최상의 표현이 될는지 모르겠다. 뭐 어떤가? 맛있으면 그만이지. 



구시가지로 가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구시가지 왕궁 앞 광장에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들어서 있어서 어느 곳 하나도 쉽게 그냥 발길을 떼기가 어렵다. 식사를 한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길거리의 음식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씨앗들을 달달한 재료와 뭉쳐놓은 과자와 비고스(채 썰어놓은 양배추와 고기를 으깬)를 먹었다. 점점 더 폴란드의 음식 맛에 익숙해져 간다. 그리고 이들의 음식은 우리 음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숙소로 돌아온 뒤 뒤늦게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을 딸이 알려주었다. 우리가 내일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를 예매했는데 크리스마스 연휴로 떠나는 사람들이 몰려 좌석이 사라졌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메일로 확인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바르샤바 기차역으로 갔다. 숙소가 바로 근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역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아니 이곳에 와서 이렇게 줄을 서야 하다니.... 대략 난감하지만 내일 서서 3시간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래 기다려 좌석을 확인하니 한 좌석만 확보하고 나머지는 입석이라고 한다. 뭐 한 좌석이라도 확보한 게 어디인가? 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다시 바르샤바로 올 때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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