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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02. 2020

2018년 겨울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1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설레는 일이다. 1995년 신혼여행 때 처음 비행기를 탔다. 방콕과 치앙마이를 다녀오는 코스였는데 어렸을 때 다리에서 추락했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6시간 동안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더구나 돌아올 때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대만을 경유해서 왔고 비행기가 타이베이 공항에서 세 번이나 착륙을 못하고 선회비행을 하는 바람에 비행기에 대한 공포가 아예 몸과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나는 한편으로는 행운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행운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 다리에서 추락해서 살아남은 건 완벽한 행운이다. 그렇지만 그런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비행기를 타고 세 번이나 선회하는 아찔한 경험을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고 그것조차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런 좁쌀 같은 마음이니 비행기로 어디 여행을 가면 몸과 마음이 모두 설레는 건 다음 문제고 당장 직면한 현실은 비행기를 잘 못 타는 공포와 긴장감이 늘 앞장선다. 전날 잠을 설치는 것은 기본이다. 온갖 상상을 동원해 나의 전두엽 안에 공포심을 한껏 불어넣는다. 


8월 큰 딸이 리투아니아 빌니우스로 교환학생을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잘 다녀오라고 했다. 보통은 미국이나 영국 혹은 호주 아니면 필리핀으로 가는데 왜 그곳으로 가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같이 가는 학생들은 있는지 미쳐 챙겨볼 겨를이 없을 만큼 힘든 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직전 한 달 동안 더위가 한창 일 때 큰 딸은 내 팔을 잡아끌고 같이 수영장에 가서 재충전을 시켜주었다. 그 덕분에 그 여름을 잘 버텨냈다. 10월이 지나면서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마일리지가 우리 부부가 갈 정도가 되기에 여행지를 여러 곳 물색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드니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스위스의 취리히 등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그런데 딸의 비행기 편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고, 마침 그때 내가 2011년 폴란드 크라쿠프를 다녀온 기억이 너무 좋아서 딸과 폴란드에서 만나 같이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딸도 버스로 올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비행기를 잘못 타는 나에게 직항 항공편은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숙소 및 식사 등에 생각보다 예산이 많이 들지 않아 어깨의 부담을 덜 수 있는 곳이었다.


바르샤바로 가는 직항 편, 폴란드 항공 LOT로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숙소는 바르샤바에 2일 크라쿠프에 2일, 그리고 다시 바르샤바 2일을 정했다. 결과적으로 호텔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살면서 점점 깨달아가는 진리와 같은 것이 있다. 가격이 싸다고 가치가 떨어지거나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가격이 비싸다고 가치와 질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가격은 선택을 위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잘 발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라는 나라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순수했고 그들은 받을 것만 받고 그 이상은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폴란드에 대해 바르샤바에 대해 크라쿠프에 대해 간단한 사전학습을 하게 되었다. 이 사전학습은 나중에 직접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데 청년 도움을 주었다. 특히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독일 공군에게 거의 괴멸되다시피 하고 영국을 공습하고 있는 상황에서 폴란드 공군을 중심으로 연합군 공격 선단을 구성하고 맨 앞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폴란드 공군의 활약상에 감동을 받았다. 독일이 2차 대전 당시 가장 먼저 쳐들어간 곳이 폴란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샤바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2차 대전이 중반으로 치닫던 무렵 바르샤바에서 일대 봉기가 일어나고 히틀러는 전체 유럽의 본보기로 바르샤바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바르샤바의 인구 거의 대다수가 죽게 되었으며, 이 와중에 소년과 어린이들도 바르샤바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떨쳐 일어났다는 얘기에 가슴 깊이 뭉클한 마음이 올라왔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딸과 통화해서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새벽 6시경에 바르샤바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다. 비행기를 잘 못 타는 나는 LOT 항공에 대해 출발 전부터 믿음을 주었다. 바로 2차 대전 폴란드 공군의 활약상이 그대로 전통이 되어 오늘날 민항기 조종에 있어서도 그 우수성을 발휘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가고 오는 동안 편안한 여행이었다. 아 그런데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맥이 풀렸다. 좌석이 가장 안쪽이었다. 화장실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온다. 다행히 아내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밝은 미소로 언제든 왔다 갔다 해도 괜찮다고 해서 조금 안심했다.


보잉 777 시리즈에 대해 나름 공부도 했다. 비행하는 동안 내내 편안했다. 기류 변화에도 민감한 나지만, 그런 기류 변화가 오자마자 위아래로 자동 보정하는 비행기 덕분에 바르샤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하게 여행을 마쳤다.  2011년 크라쿠프 여행 때 너무 추워 혼났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파커와 패딩을 잔뜩 챙겨 왔다. 그런데 공항 근처의 날씨는 예상보다 푸근했다. 택시를 타고 메트로폴 호텔로 향했다. 도착 후 카카오톡을 켜보니 딸이 바르샤바에서 은근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검색해서 두 군데를 추천해주었다. 일단 짐을 풀었다.


내일 아침 만나기로 한 딸이 저녁 식사하기에 좋은 식당으로 추천했다. Prodiz Warszawski. 입구에서 지배인이 겨우 두 좌석이 남았다며 문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왠지 비싼 느낌이 들어 걱정했는데 메뉴판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바르샤바의 첫날 분위기를 한껏 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술인데 아쉽게도 생맥주가 없다고 해서 잠시 실망했다. 그런데 장인이 만든 병맥주를 추천해준다. 아 estilo맥주는 아주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맛을 선사했다. 거기에 맥주의 깊고 은은한 향이 와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고급스러운 맥주. 생맥주만이 가장 좋은 맥주라는 인식은 산토리 몰트 맥주를 통해 적당히 날려버린 터에 이 맥주는 그야말로 신비한 맛이다. 아니 병맥주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깊고 그윽한 향과 함께 입술에 와 닿는 액상의 느낌은 부드러웠다. 대개의 맥주가 찬기운과 탄산을 머금고 들어와 목을 자극하는데 이 술은 입술을 자극한다. 그리고 목 넘김도 한없이 부드럽다. 그리고 알코올기가 세서 그런지 반잔에도 얼근하다. 마치 막걸리를 마신 느낌이다.


치즈 요리는 다른 채소 요리 및 다양한 소스들과 같이 나왔는데 일단 접시에 담겨있는 것 자체가 아주 아름다웠다. 그 색깔의 배치도 그렇고 실제로 맛을 보았을 때의 느낌도 마찬가지다. 그릇이 약간 커 보이 기는 했지만 그릇 자체도 미적 감각이 살아있는 색감과 질감이어서 반가웠는데 요리가 있어야 할 자리와 그릇 간의 적절한 공간이 요리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눈으로 먹는 요리를 체험하게 되다니. 아니지 그래도 음식은 맛을 봐야 한다. 치즈 요리는 느끼한 맛없이 담백하고 수분이 촉촉해서 맥주와 아주 잘 어울렸다.


돼지고기 요리는 슈바인 학센의 약간 거친 맛과는 다른 맛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으깬 양배추의 붉은빛과 완두콩의 녹색 그리고 바닥에 은은하게 둘러싸고 있는 소스들이 돼지고기를 감싸 안고 있었다. 맥주 한 모금과 고기 요리는 너무 잘 어울렸다. 무슨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장식해놓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두 가지 다 완벽하다고 느껴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니고 아내도 고급스러운 음식의 향미를 한껏 느꼈다고 했다. 맥주를 한 병 더 시켰다. 밖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음식과 술이었다.

바로 숙소로 가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잠시 걷다가 사람들이 많은 맥주집을 찾게 되었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주말이라 그랬던 거 같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휴라 더 분위기를 내는 게 아닐까 추해본다. 그런데 대략 난감한 건 메뉴가 전부 폴란드 언어로 되어 있고 음식을 설명할 만한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알 수 있는 것은 버거 종류인데 맥주집에서 버거를 팔다니.


잠시 멍하고 있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옆 테이블에서 스탠딩으로 음식을 드시고 계신 커플에게 시선이 갔다. 이 분들이 먹는 음식은 세 가지 종류의 채소와 감자튀김 등이 곁들여진 요리였는데 맛있어 보였다. 뭐라고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받은 것은 채소 한 종류와 감자튀김, 그리고 버거 한 종류인데 가격은 두 가지 합쳐서 1만 원 정도 했다. 알 것 같았다. 그 버거가 꼬치에 채소를 곁들인 것을 말하나 보다. 버거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났다. 적당히 식사를 하고 나온 터라 이 음식도 대단히 맛있었다. 맥주는 라거타입인데 진하고 쏘는 맛이 일품이었다. 맥주 선진국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실 유럽은 어디를 가나 다양하고 질 좋은 맥주를 먹을 수 있다. 앞서 먹은 맥주와는 다른 세계를 선사한다. 약간은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계속 잡아당겼다. 가게 안의 분위기는 젊고 활기찼다. 때마침 눈이 내려 겨울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눈 내리는 거리를 아내와 함께 걸으며, 딸 핑계를 대고 오래간만에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한다. 일부러 숙소로 가는 길을 돌아 돌아갔다. 눈 내리는 거리의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춥지 않아서 좋았다.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 가게 안은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다. 폴란드 도자기는 유명하다. 푸른 빛깔의 색감이 특히 매력적인 고장이다. 아마도 폴란드 어딘가에서 만들어와 여기서 전시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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