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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26. 2023

  차 블랜딩과 작지만 소중한 발견

일요일 아침에 해야 할 일중 하나를 찾았다. 내 마음대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블랜딩 차를 만드는 일이다. 2020년 4월에 시작했으니 이제 만 3년 반이 지났다. 음료수나 주스를 사는 일이 사라졌다. 끓인 차를 냉장고에 넣어두면 식감이 좋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블랙보리와 아기보리 그리고 볶은 옥수수를 가지고 차를 만들었다. 곧 블랜딩에 재미를 붙이면서 결명자, 현미, 수수, 팥, 서리태, 메밀과 같은 곡물들을 추가로 블랜딩 했다. 너무 많은 재료를 넣을 경우, 식감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여름에는 메밀 단일 재료만 끓여도 더위를 날려버리는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수수, 팥, 현미, 블랙보리, 서리태 등 다섯 가지 재료를 끓인다. 센 불로 팔팔 끓인 뒤 불을 낮추고 물을 조금 더 넣고 20여분을 끓이면 된다. 집안 가득 구수한 곡물의 향기가 넘친다. 재료들이 어울려서 내는 화음은 평화롭고 아늑하고 향기롭다. 곡물들이 자라던 그 들판의 대지 향기가 스며 나오는 것 같다. 그 향기에 취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차를 끓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취미도 덧붙였다. 곡물의 낱알들이 각각 뽑아 올린 대지의 자양분, 시시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결, 가끔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 곤충과 새들의 날갯짓에 흔들렸을 시간들....


어느 손에 의해 수확되고, 어느 손에 의해 정돈되고, 어느 손에 의해 볶아지고, 어느 손에 의해 포장되고, 어느 손에 의해 배송되어 여기까지 왔을까? 이 끓는 주전자 안에 자리 잡은 곡물들이 빚어내는 화음은 자연의 손길과 사람의 손길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끓는 과정에서 곡물들이 품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고 그 자양분이 끓는 물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현미의 고소함, 수수의 구수함, 팥과 서리태의 은은함, 베타글루칸 성분이 담긴 보리가 나를 감싸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번에는 다른 변주곡을 꺼낸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가족을 위한 레시피다. 잘 말려놓은 도라지, 더덕, 둥굴레, 돼지감자, 모과, 연근, 작두콩과 결명자 한 움큼을 거름망에 넣는 작업에서부터 나는 전문가가 된듯한 착각을 한다. 끓는 물속에서 이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화음은 너무 신기하다. 개별적인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화음도 굉장한데, 서로 섞이고 끓으면서 만들어내는 향기로 아침부터 기분 좋게 취한다. 나는 온라인으로 구매했을 뿐, 재료들이 여기 오기까지 거쳤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떠올려본다. 돈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가치 있는 일, 가치를 생산하는 일, 가치를 공유하는 일이란 생각을 해본다.


재료들 속에 깃든 대지와 대기, 바람과 비를 다시 한번 상상해 본다. 개별적인 재료들이 자랐을 환경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되, 이렇게 생명을 얻고 생명을 키워 여기까지 온 과정을 생각해 본다. 아마 현미경으로 이 조직 속을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한 세계가 펼쳐져 있을 터인데, 우리 몸의 세포처럼 식물들에도 엄청나게 많은 세포들이 있을진대 그 세포들이 빚어내는 이 엄청난 하모니는 마치 자연의 교향곡을 듣는 것과 같다. 이 누런 빛 색감도 너무 좋다. 이걸 마시면서 기분 좋아할 식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혹시 누구라도 보고, 또 한 두 사람이라도 내가 추천하는 레시피를 활용해서 차를 끓여서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럼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들이 여럿 있는데 거기에 하나의 이유를 더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다. 내가 원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누는 사람이었던가? 이것은 작지만 소중한 발견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흥분시킨다. 그 작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차를 마셔야겠다.


어떤 위치나, 눈에 보이는 자산이 있어야만 사람들을 배려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깨달음과 가치를 공유하는 일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책과 경험을 통해 캐낸 정보와 가치와 사소한 노력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도움이 가닿았을 때,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그가 이 사소란 기쁨에 닿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막막하지만 뻥뚫린 우주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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