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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an 21. 2024

헬싱키 암석교회에서 누리는 평온함

@1. 헬싱키 가는 길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길은 멀었다. 난생처음 북유럽의 사이언스 파크(헬싱키의 오타니에미 사이언스파크와 스웨덴 스톡홀름의 시스타 사이언스 파크)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다시 헬싱키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여정은 길고 지루하고 공포스러웠다. 7살 때 4m 되는 출렁다리에서 추락한 뒤 생긴 트라우마가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비행기는 진동이 덜했고, 헬싱키행 비행기도 날씨가 좋아서 별다른 진동 없이 내릴 수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번 생긴 높은 곳에서의 공포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뇌와 비행기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요즘은 편안히 비행기를 타지만, 당시만 해도 비행기 공포증은 가장 많은 에너지를 나에게서 뺏어갔다.


@2. 암석교회와의 첫 만남


공식 일정 사이에 암석교회를 처음 만났다. 정면의 모습은 유럽의 여느 성당이나 교회, 특히 헬싱키 교회와도 다른 아주 평범한 돌들위의 얕은 언덕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원했다. 시원한 여름 날씨여도 목이 타는 갈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화장실로 향해 수돗물을 받아 마셨다. 빙하수의 시원함으로 온몸을 채워 넣었다. 그 시원했던 느낌이 이 교회에 대해 내가 몸으로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교회 안은 너무 아름다웠다.


창틀 틈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파이프오르간, 작은 십자가와 암석으로 뒤덮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을 연상하게 했다. 특히 붉은 드레스를 입은 분이 마침 바흐의 파르티타중 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단체로 온 일정만 아니라면 여기 하루종일 앉아서 피아노 소리가 돌에 부딪쳐내는 우아한 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1969년 티모와 투오모 수오마라이넨 건축가 형제의 설계로 시내 한가운데에 있던 바위산에 조성한 루터교회다. 암석의 교회(Rock Church)라고도 불린다. 자연미와 인공미의 절묘한 조합이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두 곡 정도 감상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 너무 아쉬웠다. 언제고 다시 올 수 있을까? 만약 다시 온다면 오래도록 머무르리라.


@3. 두 번째 방문 기억의 증발

2009년에는 일행도 세명밖에 되지 않아 인상이 제법 남을 만도 한데, 주의와 집중하지 않은 기억은 모래알처럼 공중에 흩어지나 보다. 점심식사를 맛있게 한 것과 여러 곳을 다닌 기억은 선명한데 이 교회를 두 번째 방문했던 기억은 통째로 사라졌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증발된 탓도 있겠지만, 이 장소를 내가 가볍게 인식하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4. 다시 두 번째 만남


내 기억 속에서는 2006년 이후 두 번째 만남인 것이다.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암반의 구조, 쌓은 돌들의 기울기와 간격, 천정의 아득한 동심원들, 창틀 사이에도 장식처럼 쌓아놓은 돌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입장료 8유로를 받는다는 점이다. 작년만 해도 5유로를 받았다는데... 또 하나 달라진 점은 화장실을 개방하지 않는다. 사실 2006년 나의 갈증을 해소해 주던 그 수돗물을 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갈 수 없다니 너무 아쉽다. 경험을 통해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있던 차라 그 아쉬움은 배가 된다.

@5. 몸과 마음이 쉬는 시간


헬싱키 대성당의 십자가도 작고 소박했었는데, 이 교회의 십자가도 작다. 예수님의 양상을 닮은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박하고 작다. 작은 십자가가 전체 건물의 구조와 잘 어울려서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선명하고 뚜렷한 가로 세로 선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설교대도 낮고 작다. 그 뒤로 거칠지만 자연의 풍화과정을 그대로 안고 있는 암석이 감싸 안고 있다. 낮고 작은 것이 지향하는 바가 사람들과 비슷한 눈높이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함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종교는 자연에서 출발하여 사람들 눈높이로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라고 암석교회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더 높은 곳에 더 권위적인 자태를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권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그 권위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사람들이 만든 권위,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장소에 자리를 잡는다. 누가 언제 가자는 말도 없이 그저 앉아서 각자의 상념에 빠진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운데 암석들의 모습을 살피다가, 천정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수많은 원들이 그려내는 중심과 바깥을 살펴본다. 그러다가 추위에 녹은 몸이 잠시 쉬려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게 해서 잠시 온몸과 마음이 쉬게 만드는 음악이라고 생각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은 공간에서 쉰다는 것은 자주 만나는 행운은 아니다. 잠시 잠깐 눈 붙이고 나니 온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지난 5일간의 빡빡한 공식적인 일정으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해소된다. 이번에는 1층과 2층을 찬찬히 걸으면서 살핀다. 


돌들 사이의 틈과 돌이 쌓인 각도를 살피다가 그중 딱 하나의 돌이 약간 비틀린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그게 약간 특이하게 느껴졌었다. 사람들과 사람들 간에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관계가 있을까? 약간 비틀어지고 뒤틀려도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그 자체가 평화가 아닐까라고 혼자 헛소리를 해본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바위의 숨결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자연의 삶이 인간 세계로 넘어오고 인간의 삶이 자연의 일부분으로 가는 지점에 자연과 사람의 삶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래도 남는 아쉬움 하나. 누군가가 이 시점에 저 피아노나 아니면 파이프 오르간으로 뭔가 아름다운 연주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다시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은하수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형상이다. 작은 원에서 시작해서 점점 큰 원으로 그렇게 동으로 만든 천정의 그 원들이. 수많은 별이 되고,  그 별들의 궤도가 그리는 그림을 느낀다. 사선으로 꽂아놓은 창틀 수십 개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오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빛의 아늑함이 살아있도록 설계가 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통창으로 돼 있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예배도 집중하겠지만, 저 창틀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의 존재감을 느끼리라. 그리고 거기서 뭔가 자연이 주는 영감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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