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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3일 : #2 얀 후스와 카를교

by 새로나무


체코를 대표하는 인물 중 얀 후스는 정면으로 교황청과 맞섰던 그래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위대한 혁신 가다. 얀 후스(Jan Hus, 1369–1415)는 체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15세기 종교 개혁의 선구자이자 보헤미아 지역(현재 체코)의 종교적,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후에 종교 개혁과 민족의 독립운동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얀 후스는 1369년경 보헤미아 왕국의 후시네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 카를 대학교(Charles University)에서 공부한 후 사제가 되었고, 1402년부터 프라하 베들레헴 성당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후스는 신앙적인 순수성과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당시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타락, 성직자들의 사치와 부패, 면죄부 판매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후스는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보다도 성경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크게 충돌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중세 말기 종교 개혁 사상가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사상을 수용하여 더욱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번역하고 그 사상을 보헤미아로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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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사상은 14세기 중세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개혁을 촉구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위클리프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그의 사상은 이후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스는 이러한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지역에서 확산시켰다.


우선, 성경이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권위라고 주장하고, 교황이나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신자가 성경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만 되어 있었고, 일반 신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위클리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대중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교회의 세속적 권력을 비판한 점이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부유하게 살아가는 성직자들을 비판했고, 이러한 교회의 부패가 성경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재산과 권력을 제한하고, 교회가 영적인 가르침과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셋째,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 계층 구조를 부정했다. 그는 교황이 성경적 근거 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모든 성직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하게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이 지닌 무오성(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을 인정하지 않았다.


넷째, 위클리프는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특히 성찬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화체설, Transubstantiation)를 부정했다. 위클리프는 성찬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섯째, 위클리프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교회의 권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면죄부를 팔거나 선행을 강조하여 구원을 거래처럼 여기는 것을 비판하고, 구원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후스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것 외에도 성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일반 신자들에게 빵만 제공하고, 성직자들만 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후스는 모든 신자가 빵과 포도주 모두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나중에 후스파 운동(Hussite Movement)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후스의 사상과 설교는 결국 교회 당국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는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Constance Council)에 소환되었다. 후스는 자신의 사상을 변호할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공의회는 후스의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후스는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1415년 7월 6일, 후스는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얀 후스의 처형은 보헤미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후스의 추종자들은 후스의 죽음을 계기로 후스파 운동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후스 전쟁(Hussite Wars, 1419–1434)으로 이어졌다. 후스파는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싸우며, 체코 역사에서 중요한 독립적 종교 및 민족 운동을 펼쳤다. 후스파 중 온건파는 가톨릭과 어느 정도 타협할 용의가 있었던 반면, 급진파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성경에 따른 순수한 신앙생활을 주장했다. 이 두 그룹은 서로 갈등을 겪었으나, 후스파는 체코에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얀 후스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후스의 사상과 그가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판한 점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루터는 후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100년 후에 일어난 루터의 종교개혁은 후스의 신념과 유사한 맥락에서 발전되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 신념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향해야 할 사람에 대한 봉사와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얀 후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드릴 일이다. 종교가 인간을 위하지 못하고 몇몇 별 볼 일 없는 인간들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위클리프와 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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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여러 군데에서 굴뚝빵을 체코 전통 음식으로 팔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굴뚝빵 또는 아이스크림이 얹어진 굴뚝빵을 먹고 있었다. 속이 비어있는 빵에 겉엔 설탕을 뿌리고 아이스크림을 올려놓은 것을 하나 사서 나눠먹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부드럽고 진하고 달콤하면서도 가볍지 않아 자꾸 먹게 된다. 빵도 달콤하고 부드럽다. 많이 좋아할 만한 맛이다. 이 음식을 파는 곳이 여기저기 많은 것을 보면 장사도 될 테고 사람들도 많이 찾아서….. 이 또한 탕후루처럼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가는 물결이리라. 아니 여기가 원조라고 하니 원조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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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교에 들어서니 저 멀리 프라하성과 이어진 풍경들이 낯설지 않다. 인파의 물결 속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겨우 빈 곳을 찾아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다리 양쪽 블타바 강과 유람선과 다른 다리와 시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오면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떠올리게 된다. 강물 속에 비친 옅은 빛의 잔잔한 흐름 속에서 건져 올린 그의 악상은 아름답고, 힘차고 감동적이다. 1989년에 처음 들었으니 꽤 오래전 일임에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 밀려온다.


카를교를 건너 골목길을 조금 더 걷는다. 서점 옆 카페가 운치 있어 보인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조그만 마당도 보인다. 커피 한잔 하면서 쉬기 적당한 곳이라 내일 프라하성 갔다고 내려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관광객이 가장 몰리는 시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이 많은 사람들 있었고 군데군데 패키지로 온 사람들도 분주히 일행들을 뒤따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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