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팀원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전문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이 바뀐다. 각자의 강점을 가진 개인들을 어떻게 하나의 팀으로 정렬할 것인가?
조직심리학은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팀이 일관되게 움직이려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판단의 기준인 ‘공유 정신 모델(Shared Mental Model)’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준이 갖춰진 팀은 일일이 조율하지 않아도 비슷한 방식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비슷한 방향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 공유 정신 모델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바로 기업의 가치와 문화다.
기업마다 나름의 경영철학이 있다. LG Way는 고객을 중시하고 인간을 존중한다. NC Value는 우주 정복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상상력과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요구한다. SKMS는 과학적 사고와 구성원의 행복을 중심에 둔다. 토스나 배달의 민족 같은 스타트업은 더욱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내용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 가치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같다. 구성원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공통의 언어가 된다.
그런데 팀원들은 종종 이를 고상한 구호 정도로 여긴다. ‘고객 중심’, ‘혁신’, ‘Integrity’, ‘자발성’ 같은 말들이 PC 바탕화면이나 회의실 벽에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업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 그럴까. 가치를 전달했지만 체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치가 구성원의 몸속에 살아있는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암기로부터 시작한 가치 전파: NC Value Challenge
엔씨소프트는 학력, 전공, 경력, 나이 등 구성원의 다양성이 매우 큰 회사였다. 이 다양성을 포용하면서도 한 방향으로 정렬하기 위해, 기업의 가치인 ‘NC Value’를 어떻게 전파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엔씨소프트 COO(수석부사장)와의 대화는 늘 배움의 시간이었다. 대화가 끝나고 나면 몇 달간 고민해야 할 질문이 남았다. 그가 NC Value 내재화의 첫 단계로 제시한 것은 ‘암기’와 ‘시험’이라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창의와 자율이 생명인 게임 회사에서 암기를 시키자는 발상에 나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암기는 단순히 텍스트를 외우는 차원이 아니었다. 재즈 뮤지션이 화성학을 완전히 체화한 후에야 악보 없이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할 수 있듯이, NC Value를 이해하고 암기한 구성원들은 가치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암기는 출발점이다. 암기가 이해로, 이해가 체화로, 체화가 자율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첫 번째 계단이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이 철학을 구현한 ‘NC Value Challenge’를 설계했다. 총 세 개의 미션이 각각 암기, 이해, 체화의 단계를 담당했다.
첫 번째 미션은 교육 기간 내에 NC Value 전문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게임 회사인 만큼 단순한 지필 시험 대신 게임 형태의 조별 경쟁으로 설계했다. NC Value 전문의 모든 단어를 자석 낱말 카드로 만들어 테이블 위에 뒤섞어 놓았다. 각 조에서 한 명씩 칠판으로 달려 나가 카드를 붙여 전체 문장을 완성하는 릴레이 게임이었다. 한 번에 하나의 단어만 붙일 수 있고, 서로 상의도 할 수 없다. 내가 잘 외우지 못하면 조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모두가 이해와 암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미션은 Integrity, Passion, Never-ending Challenge와 같은 가치를 네 칸 만화로 표현하고 시놉시스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암기한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게 함으로써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의도했다. 학습한 개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 기억은 더 깊고 오래 남는다. 평가는 갤러리 워크 방식으로 진행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참가자들이 전시된 결과물을 돌아다니며 관람하고 피드백하는 학습 기법이다. 각 조가 다른 조의 작품을 돌아보며 NC Value의 의미에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상호 평가하여 점수를 부여했다.
세 번째 미션은 두 개의 세부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활동은 소통의 어려움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조별로 한 명을 선정해 별도의 방에 준비된 레고 모형을 확인하게 했다. 돌아와서는 글이나 그림 없이 말로만 그 모양을 설명해야 했고, 나머지 조원들은 설명만 듣고 동일한 모형을 조립해야 했다. 점수는 정확히 맞춘 조각의 수로 산출했다. 평면에 놓인 간단한 레고 조각조차 완벽히 재현하는 조는 없었다. 우리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이를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활동이었다.
두 번째 활동은 NC Value가 체화된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레고로 만들고, 다른 조를 스토리텔링으로 설득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NC Value에는 “작고 알차고 강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작다’는 것은 팀의 규모가 아니라 긴밀한 팀워크를 의미한다. 그 본연의 의미가 레고 구조물에서 드러나야 하고, 발표를 통해 충분히 설명되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개념을 손으로 만지고 말로 설득하는 과정에서, 가치는 비로소 추상이 아닌 실체가 된다.
NC Value Challenge를 통해 단순한 설명으로는 전달하기 어렵거나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기업의 가치를 재미있게 체험하도록 했다. 신규 입사자 과정은 고된 암기 과정을 거쳤음에도 만족도가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무엇보다 NC Value의 이해도와 조직문화 점수가 정량적으로 향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암기를 시키나요?”, “창의성이 중요한 게임업계에서 왜 암기를 하나요?”라는 반문도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가치를 집요하게 고민하고 체화하는 활동은 아무리 자율적이고 수평적이며 창의가 필요한 회사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가치와 조직문화에 부합하지 않게 행동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그의 태도를 지적하기 이전에 그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소위, ‘나쁜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팀장도 마찬가지다. 구성원에게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기대하기 전에 팀장이 먼저 그 가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치는 포스터에 붙어 있는 문장이 아니라, 팀장의 일상적인 판단과 행동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기업 가치가 추상적일수록 암기와 이해가 먼저다.
가치가 만든 고성과: 쿠르드 정부 지원 프로젝트
LG전자 연수원에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적이 있다. 후세인 정권 붕괴 후 IT를 통한 성장을 꿈꾸는 쿠르드 자치정부의 요청으로 이라크, 터키, 시리아의 대학생 120여 명을 선발하고, 두 차수에 걸쳐 한국으로 초빙해 총 4개월간 개발자로 양성하는 미션이었다.
교육 첫 주, 교육장이 술렁였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들이 정해진 시각에 메카 방향으로 기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빈 강의실 하나를 예약해서 요가 수업용 파란색 고무 매트를 빌려와 깔고, 날짜별 일출과 일몰 시각을 출력해서 벽에 부착하고 메카 방향을 표기해 주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고려해 교육 시간표를 재편성했다.
라마단 기간은 더 큰 도전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교육 방식을 바꿨다. 오전에는 이론 중심의 가벼운 학습을, 일몰 후에는 실습 위주의 집중 교육을 진행했다.
음식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축된 고기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연수원의 조리사가 이태원의 할랄 음식점에서 요리를 배우고 고기를 구입했다. 돼지고기는 물론, 돼지고기를 다룬 도구도 철저히 분리했다. 식당 한쪽에 할랄 전용 조리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이 쌓이자 그들은 점차 마음을 열고 안정감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모든 학생이 수료했다. 교수진은 수료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 대표도 덧붙였다. “브라더, 교육 내용이 기대 이상이었고, 음식도 잘 맞았습니다. “
돌이켜보면, 우리가 한 일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 것뿐이었다. 그것이 120명의 학생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킨 힘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쿠르드 자치정부 내 한국 전자제품 점유율이 80%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종교가 집단을 한 방향으로 묶는 초월적 힘인 것처럼, 기업에서는 기업문화와 핵심 가치가 그 역할을 한다.
SKMS(SK Management System), 삼성핵심가치, 현대 Way, LG Way, NC Value, Lotte Way, Toss Core value와 같은 기업의 가치 체계가 액자 속 구호처럼 무용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일관되게 강조하면, 조직을 하나로 묶는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기업 가치를 팀의 가치로 만드는 역할
팀장이 직면하는 현실적 과제 중 하나는 추상적인 기업 가치를 팀 수준의 구체적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전사 차원의 가치는 넓은 범위의 구성원을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 추상성을 팀의 일상 업무와 연결하는 것은 팀장의 몫이다. 다만 그 연결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어떤 팀은 업무 원칙으로, 어떤 팀은 일하는 방식으로, 또 어떤 팀은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가치를 구체화한다. 회사 차원의 가치를 팀 업무 특성에 맞게 재해석한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가치가 업무 원칙으로 구체화된 경우다. N사의 'Integrity'는 전사 차원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라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대외홍보팀은 이를 '모든 메시지를 사실에 기반해 작성하며, 과장 없는 진정성으로 소통한다'는 구체적인 행동 원칙으로 재정의했다. 이 팀은 보도자료나 SNS 콘텐츠를 작성할 때 검증되지 않은 표현을 배제한다. 신제품 출시 홍보에서도 '혁신적', '최고의' 같은 수식어보다는 객관적 데이터와 사실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포장을 피하고 사실을 명확히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한 팀원은 "처음엔 경쟁사보다 임팩트가 약해 보일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언론과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가치를 구체화하는 방식이 업무 원칙에 그치지 않고, 팀의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L사의 '인간존중'이 그 예다. 기업 차원에서는 '임직원의 존엄성과 창의성 존중'이라는 철학적 개념이지만, 팀에서는 팀원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을 포용한다는 실천 가이드로 구체화했다. 문제는 그 실천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이디어 회의에서는 늘 브레인스토밍을 활용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브레인스토밍은 자유로운 발상을 유도하는 방법이지만, 목소리가 크거나 직급이 높은 이른바 빅마우스(Big Mouth)가 회의 초반을 장악하면 분위기가 경직되어 버린다. 첫 번째 발언이 강하게 제시되는 순간, 나머지 참여자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방향에 맞춰 생각하거나 침묵을 선택한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가 작동하는 것이다. 앵커링 효과란 처음 접한 정보나 발언이 이후의 판단과 사고에 강력한 기준점으로 작용하는 현상이다. 마치 배가 닻(anchor)을 내리면 그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듯, 회의 초반의 발언 하나가 이후 모든 아이디어의 방향을 묶어버린다. 수직적 위계가 남아 있는 조직에서는 이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신입사원이나 내성적인 팀원의 아이디어는 발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인간존중'을 추구하는 팀에서 정작 아이디어의 불평등이 반복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팀들은 브레인라이팅(Brainwriting)을 활용했다. 브레인라이팅은 아이디어를 써서 모으는 방식이다. 참여자들이 아이디어를 각자 작성한 후 한꺼번에 제출하기 때문에 발언 순서나 목소리 크기와 무관하게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인턴 직원이 제안한 SNS 챌린지 아이디어가 대형 캠페인으로 발전해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이러한 방식이 자리를 잡은 뒤의 일이었다. 홍보물 제작 과정에서도 한 명의 시니어 기획자가 주도하기보다는 팀 전체의 다양한 시각이 반영될 수 있게 되었다. 가치가 원칙의 선언에 머물렀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하는 방식까지 바뀌었기 때문에 '인간존중'이 팀에서 작동할 수 있었다.
가치가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는 경우도 있다. T사의 핵심가치 중 하나인 '사명감(Mission driven Mindset)'은 '팀의 미션을 내 삶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팀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간다'는 행동 원칙으로 구성된다. 대외홍보팀은 이를 '기업의 미션을 모든 홍보 활동의 중심에 두고, 일관된 메시지로 전달한다'는 명확한 기준으로 재정의했다. 새로운 캠페인을 기획하거나 위기 상황에 대응할 때, 이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이 활동이 우리의 미션인 '누구에게나 쉽고 상식적인 금융'을 강화하는가?"이다. 화려한 광고로 단기적 주목을 끌 수 있더라도 미션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폐기한다. 채널이나 상황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달라져도 핵심 메시지의 일관성은 철저히 유지한다. 사명감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선 세 가지 사례는 추상적인 가치를 그대로 팀에 이식하려 하지 않고, 팀 고유의 업무 특성을 고려해 재해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N사는 업무 원칙으로, L사는 일하는 방식으로, T사는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가치를 재해석했다. 같은 가치라도 팀이 다르면 번역의 결과도 달라진다. 개발팀이라면 'Integrity'를 문제를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으로, 영업팀이라면 고객에게 과장된 약속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재해석의 과정에서 한 가지 원칙이 있다. 팀장 혼자 결정해 공표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팀원들이 직접 논의하고 합의한 언어만이 일상의 기준으로 뿌리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