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사람들은 늘 앞날을 계산하며 삽니다.
이번 달은 어떻게 버틸지, 다음 달은 괜찮을지. 냉장고를 열며 한숨을 쉬고, 옷장을 보며 괜히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오늘의 숨을 먼저 가져가 버립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전혀 다른 장면을 가리켰습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 들판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꽃들. 그들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저장해 두지 않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꽤 단정하고,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걱정이 정말 하루를 더 살게 해 주었느냐고. 불안이 몸을 더 따뜻하게, 삶을 더 안전하게 만든 적이 있었느냐고.
그의 말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었고,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오늘의 어깨에 내일의 무게까지 얹지 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루치 불안이면 하루를 살기에 이미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삶의 중심을 살짝 옮기자고 제안합니다. 당장 손에 쥐려 애쓰는 것들보다, 어떤 방향으로 살고 싶은지를 먼저 붙들어 보자고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꼭 필요했던 것들은 조금 뒤에서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내일은 내일이 감당하게 두고, 오늘은 오늘만큼만 숨 쉬어도 괜찮다고.
삶은 생각보다, 우리가 버텨내야 할 것보다, 조금 더 우리 편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 : 25~34 생존을 넘어 사명의 자리로)
'나는 어떤 방향으로 살고 싶은 걸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매일 같이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저만치 앞서간 이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커 보일 때,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친구들의 세찬 공기가 내 마음을 베어낼 때면 괜히 엉덩이는 들썩이고 생각은 더 깊어집니다. 멀게만 느껴지는 그곳을 향해 힘껏 내디뎌 봐도 잠시뿐, 버거운 삶에 조금씩 지쳐갑니다.
양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바닥에 드러눕습니다. 그제야 길가에 핀 샛노란 개나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낸 그들이 대견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가냘프면서도 튼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개나리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니, 살아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들이 있는 힘껏 살아낸 하루들로 빚어진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개나리는 화려한 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찬 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딱 한 뼘만큼만 자라나려 애썼을 뿐이겠지요.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를 산 자신을 조용히 토닥였을지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내편입니다. 더구나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조금 더 지혜롭고 강인하고 아름울 것입니다.
믿어주려 합니다. 내일의 나를. 그곳을 향해 나아간, 오늘의 작은 발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