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태된 김 부장과 능력 없는 아내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13세 딸

by jingzhen

2025년 12월 6일 저녁 6시 30분 서울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역사 안.

"엄마는 요즘도 생각해. 내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해 대학에 갔다면 능력 있는 직업을 가졌을 텐데."

우리 엄마는 간호조무사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빠가 직장을 잃었고 엄마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 일을 시작했다. 14년 만에 전업 주부 생활을 청산한 거다. 지금은 걸으면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한의원에서 일한다.

"능력 있는 직업이 뭔데?"

내가 물었다.

"의사나 한의사, 간호사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들 있잖아."

"간호조무사도 의사나 간호사만큼 어렵진 않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일을 하잖아."

"에이, 아니야. 간호조무사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허드렛일이야."

"그렇지 않지. 간호조무사가 하는 일은 법적으로 아무나 할 수가 없잖아. 치료실에서 한의사가 놓은 침은 간호조무사 이상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뺄 수 있다며. 그래서 엄마네 한의원 수납 직원은 치료실에 못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간호조무사 자격증은 공부만 하면 누구나 딸 수 있어. 너처럼 기자가 되려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잖아. 근데 간호조무사는 아니야."

"간호조무사는 국가가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능력과 지식을 공인해 주니까 대학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거고. 기자는 능력을 판단할 지표가 없으니까 언론사들이 어떻게 해야 능력자를 뽑을지 고민하다가 학벌을 보기로 한 거지."

"아무튼, 간호조무사는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될 수 있어."




2025년 12월 6일 오후 1시 서울 지하철 3호선 교대역 인근 심리상담센터.

"이번 주는 바깥으로 취재 안 나가고 회사에서 내내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리고 기사를 썼어요. 그래서 우울해요."

엄마와 '능력 없는' 간호조무사 논쟁을 벌이기 전, 심리상담센터를 다녀왔었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난 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오고 있다. 센터를 다닌 지도 벌써 8개월 째다.

"회사에만 있으면 우울해요?"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1급 자격증을 가진 '능력 있는'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네. 그냥 증권사들이 낸 기업 보고서를 조금만 잘 정리하면 기사가 되거든요. 저는 뭘 쉽게 얻어내면 자존심이 상해요. 보고서를 잘 요약해서 기사 쓰는 일은 AI도 잘하니까, 이런 기사 쓰는 것에 만족하는 기자들은 능력이 없어서 조만간 AI에 다 대체될 거예요."

"자신의 '능력 없음'을 경계하고 있네요.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고요. 그런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만년 부장'들이나 도태될 걱정을 하는 거 아닌가요? 동기들은 쭉쭉 진급하는데 나만 부장일 때는 도태를 걱정할 수 있겠지만, 이제 일한 지 1년 된 사람이 왜 도태를 생각하는지 의문입니다."

"언론이라는 업계도 도태되고 있고, ○○일보라는 저희 회사도 도태되고 있고, □□국이라는 저희 국도 도태되고 있고, 그 안에 있는 저희 팀도 도태되고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유망한 분야가 있나요. 요즘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는데요. 인생에 성공 아니면 도태밖에 없나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아니면 뭐가 있어요?"

"그냥 사는 거죠. 성공이나 실패도 사는 것의 한 양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도태돼서 회사에서 잘리면 어떻게 살아요?"

"김 부장 이야기에 류승룡을 보세요. 세차하면서 살아가요. 주변에 누가 회사 잘려서 못 산 사람 있어요? 회사에서 잘렸다고 하면 누가 생각나요?"

"아빠요."

"그러면 아빠는 도태된 사람이네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을 관둔 아빠를 보기가 참 힘들었나 봐요. 아빠가 도태돼서 일 안 하던 엄마를 일하게 했고,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식으로서 봐야 했고요."

"제가 아빠를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요."

"그런데 아빠 때문에 엄마가 고생했잖아요. 엄마가 힘들다는 티를 내셨나요? 엄마는 어떤 모습으로 사셨어요? 엄마들이 힘들면 자식들한테 짜증을 부리기도 하는데."

"엄마가 저희에게 짜증을 많이 내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고요. 아빠한테는 '나는 일 안 하고 싶은데 내가 일을 안 하면 대출 이자는 누가 내냐'면서 화를 많이 내셨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게 느껴지세요?"

"..."

"뭐가 느껴지기는 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엄청난데."

"뭐가요?"

"지금 내담자님한테서 느껴지는 느낌이요."

내 직장을 빼앗을지 모를 AI '챗GPT'가 생성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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