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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국어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나민애의 <나의 두 번째 교과서 x 나민애의 다시 만난 국어>를 읽고

by 손수제비

'문해력이 문제'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영어유치원을 가고 인간이 아닌 AI와 소통하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우리말을 읽고 쓰는 능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 부모와 소통하고 배우며, 관계를 맺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언어'가 있다.



IE003468958_STD.jpg 책 <다시 만난 국어> 표지 ⓒ 페이지2북스



책 <나의 두 번째 교과서 x 나민애의 다시 만난 국어>(2024년 12월 발간)는 국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저자는 나태주 시인의 딸이자 대학 교수인 동시에 '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원고지 빨간 네모칸에 '국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인 표지를 보며 딱딱한 수업시간 같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책을 읽으며 '서울대 강의평가 1위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라는 타이틀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책은 다정하고 재미있고 유익했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듣기, 말하기, 읽기, 그리고 쓰기. 이 책은 이 중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독서를 좋아해 읽기 파트에 집중하며 읽었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100명 중 시집을 읽는 학생은 고작 1~2명 정도라 한다. 대형 서점이나 도서관을 가도 시집보다는 소설과 자기 계발 도서, 에세이가 더 많다.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영상이 아닌 텍스트를 보는 시민을 간혹 보지만, 시집을 읽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꼴찌만 하지 말자, 중간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던 내가 갑자기 1%가 됐다. 하필(?) 요즘 시집을 읽는 중이니. 그런데 다른 도서에 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왜 적을까.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서정시를 읽을 때도 그런 기분이 듭니다. 조금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서정시는 세계를 자아화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를 '나'라고 하는 렌즈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은 거죠.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면 고양이 똥도 사랑스럽게 보이죠. 내가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반짝거리고, 기분이 나쁘면 세상이 우울해 보여요. 이런 게 '세계를 자아화한다'라는 의미입니다. - p63


이게 무슨 소린가. 한 마디로 '시는 어렵다'는 말이다. 같은 세상이라도 개개인이라는 렌즈를 통해 만나는 세상은 모두 다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낯선 세계, 이것이 시이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세상을 읽는다니! 이러니 생소하고 어려울 수밖에.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현은 또 어떤가. 압축, 은유, 비유 등 뭣이 그리 비밀스러운지. 분명 우리말과 글인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느낌이랄까. "어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은 좀 잡았어?" 어렵고 낯설고 이상한(?) 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민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지만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고 마법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살잖아요. 인생이 소중한 건 게임처럼 리셋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 p64


몇 줄 안 되는 시 한 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번은 읽어야 한다. 시인이 보는 세상을 시인의 언어로 적은 것을 제삼자인 내가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나의 경우 100페이지 남짓 되는 시집 한 권 읽는 게 소설이나 에세이 한 권 읽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린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드는 느낌은 대개 비슷하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


하지만 시를 통해 얻는 것도 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인의 정서가 어떤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공감과 경청의 근육을 키운다. 듣기보다 말하기가 익숙한 세상,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세상에서 공감과 경청의 능력은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이다.


시에 비해 소설은 인기가 많다. 소설은 쉽고 재미있다. 세상을 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시와 다르지 않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사람이 소설가입니다. 시가 외부 세계를 내 안으로 끌어당겨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면, 소설은 내 안에 있는 것을 외부 세계로 펼쳐놓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객관적인 것을 주관화하는 게 시라면,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것이 소설인 것이죠. -p99


누군가는 소설을 단순한 픽션이라고 한다. 다른 누군가는 소설책 읽을 시간에 사회과학이나 자기 계발 도서 같은 도움이 되는 책을 권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게 된다. 소설을 통해 '재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다양한 사회를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미리 보기라고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경우가 있겠구나", "직장인한테 이런 애환이 있지", "연애할 때 이런 마음이지"라고 미리 간접 체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다양해진다는 장점이 있어요. -p117


시와 소설 외에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고전시가'였다. 무수히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고전은 그중에서도 불굴의 생존력을 자랑하며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다.


고전시가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결같음'에 있다. 사는 모습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마음, 고전시가는 이런 변하지 않는 것들을 노래한다.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인간의 내면은 변하지 않기에, 고전을 읽는 것은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통과 공감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익숙한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전을 읽는 이유이다.



IE003468962_STD.jpg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들.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한다. ⓒ손수제비



더 넓은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쉽지 않은데 '다양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텍스트 보다 미디어와 영상이 익숙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뭐라도 읽는' 것이겠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만 주구장창 읽을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한 분야를 오래 읽음으로써 깊은 즐거움을 누릴 테니. 음식으로 치자면 1년 365일 먹어도 지겹지 않은 소울푸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의 글을 읽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다양한 경험은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 주기에. 기쁠 때와 슬플 때는 시와 고전시가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거나 내가 좋아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싶을 때는 소설을, 삭막한 삶 속에서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을 때는 동화를,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에세이를 읽으며 우리는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쓰기'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쓰기는 읽기와는 또 다른 영역이다. 읽는 것에 비해 힘이 들고 고생에 비해 얻는 게 작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읽기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지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무언가를 끼적일 수 있지만, 내가 가진 생각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나 자신을 더 알아갈 수 있다.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읽고 쓰는 삶의 즐거움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나민애 교수의 <다시 만난 국어>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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