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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노동이 읽히고 알려지기를 바라며

책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고

by 손수제비
IE003533778_STD.jpg 책 <어떤 동사의 멸종> 표지 ⓒ 시대의 창


노동을 소재로 다루는 책을 좋아한다. 이번에 읽은 책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2024)은 몇 가지 직업에 대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쓴 글은 간접적으로나마 그 일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노동과 관련된 책들은 대부분 저자의 진심이 담겨있기에,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책에 소개된) 노동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뻘건 표지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물고기가 떡하니 있는 괴기스러운 표지와는 달리 이 책은 개그 요소가 가득하다. 전화 상담원, 배송 노동자, 주방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지만 동시에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신비로운 책이다. 인터뷰를 기반으로 제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 아닌,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내용이 무척 디테일하고 실제적이다.


스스로를 노동 문학계의 셀럽이라고 칭하는 저자는 늘 인터넷으로 본인의 이름과 책을 검색한다고 한다. 그의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읽혔는지, 셀럽의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솔직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의미한 주제와 예사롭지 않은 필력, 무엇보다 노동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진심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다.


잘 모르지만 알아야 할 세계


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직업은 '콜센터 직원'이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직업보다 콜센터 노동자가 최악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센터 노동자들이 모두 해결해야 하며, 따라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전화를 하는 목적 자체가 단순 문의보다는 불만인 경우가 많다. 소리를 지르거나 일단 화부터 내고 보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업무이다. 국민소득은 꾸준히 상승하지만 국민들의 인격은 그렇지 않기에,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류센터 직원의 삶은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가는 부분이었다. 주위에 투잡으로 택배 일을 하는 지인이 있기도 하고, 하고자 할 의욕과 강인한 체력만 있으면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쿠팡은 불황에도 불구하고 1년 365일 근무자를 뽑느라 바쁘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선뜻 택배 노동을 선택한다.


하지만 '까대기'를 몸소 경험한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까대기 할 때는 몸에서 물이 샌다. 줄줄 샌다. 누수(漏水). 이것이 까대기 할 때 우리의 피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실제에 가깝게 묘사한 단어다. 이 때문에 컨테이너를 하나 끝낼 때마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우물을 발견한 것처럼 물을 마신다. 그렇게 마셔도 금세 땀으로 배출돼서 화장실을 기껏해야 한두 번 갈까 말까 한다. -133

하루에 평균 열 대 작업하고 한 차에는 짐이 1000개, 평균 중량은 5킬로그램이다. 이걸 두 사람이 작업하면 한 사람당 하루에 운반하는 총중량은 25톤이다. 전체 화물 중 3분의 1 정도는 옮길 때 몸을 굽혔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반하므로 하루 전체에 걸쳐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횟수는 적게 잡아도 1500번이다. 즉, 하루에 25톤과 1000번이다. 한반도에서 하루에 이 정도 신체 활동량을 요구하는 곳은 물류센터를 제외하면 태릉선수촌뿐이다. -140


즉시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주방노동의 경우 경력이 없다면 거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근무 내내 뜨거운 화력에 노출되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군기가 엄격하다. 자칫하면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업무환경 특성상 노동자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다. 열악한 환경을 비웃는듯한 낮은 급여는 직원들의 잦은 이직으로 이어진다.


흔히 주방이모라고 부르는 이들의 업무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들은 고객 응대부터 음식 준비, 설거지를 하며 직접 배달을 가기도 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긴장과 부상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는 주방 노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 하지만 이런 험난함 속에서도 결코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여자들은 가게가 망하기 전까진 절대 안 그만둬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필사적이에요. 절대 중간에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은 애 있는 엄마들이에요. 직원들이 자꾸 들락날락해서 골치가 아픈 사람은 애 키우는 엄마들만 뽑아야 돼요." - 259


더 많은 '노동 문학계의 셀럽'들이 나왔으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한다. 인공지능(AI)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는 무려 9천 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 하지만 직업 선택에 우선권이 있는 사람들, 시간과 물질을 바탕으로 오로지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은 의사 같은 소수 전문직에 극단적으로 몰린다.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처음부터 '그들만의 리그'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안정적이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덜 힘든 일을 찾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인지,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은 직업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먹고살기 위해,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수년간, 어쩌면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직업 선택을 선택함에 있어서 지금보다는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변호사, 검사, 도서관 사서,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현업에서 뛰고 있는 노동자들의 책은 셀 수 없이 많다. 현실 문제,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가들의 동인 '월급사실주의'는 소설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양한 노동 현장을 다룬다. 이런 류의 책들을 읽음으로써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을 갖고 생활하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꼭 책이 아니라도 괜찮다. 부모님이나 친척, 지인들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업무 환경을 들을 수도 있다. 토익 점수를 높이고 어학연수를 가는 것도 좋지만,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직업 선택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노동은 지속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평균수명이 길어질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쏟아부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취업 준비를 위해 스펙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승태 작가와 같은, 더 많은 '노동 문학계의 셀럽'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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