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가난>, <벼랑 끝이지만 아직 떨어지진 않았어>를 읽고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다. 효율적이고 빠른 삶이 미덕인 시대라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나라에만 매일 1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많은 이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누군가는 예상하지 못한 때에 사고로 죽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한 보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에서는 매일 36.6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매해 사망자 수는 늘어나는데 기피시설인 화장시설을 새로 만들기는 어렵다 보니, 화장장이 두 곳뿐인 서울에서는 유명 공연을 티켓팅하듯이 화장 예약을 잡는 웃픈 현실을 볼 수 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함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발적인 죽음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2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즉 삶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인함이다. 대부분 삶은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나에게 닥쳐온 문제들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삶이 아닌 죽음을 생각할 확률이 높아진다.
또 하나, 처음부터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경우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누군가는 가난, 고아, 신체의 질병과 같은 다양한 옵션을 갖고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는 사람들, 최소한의 교육과 인간다운 존엄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삶에 대한 의지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최근에 읽은 책의 저자들은 후자인 '남들과 출발선이 다른 경우'에 해당되었다. 그들은 출생과 동시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장애인 부모와 가난'이라는 삶을 떠안았다. 하지만 이들은 (충분히 자살을 떠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한다.
이 책의 저자는 올해 26살로 20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가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주공아파트에서 삶을 이어온 그녀는 수급자 생활에서는 탈피했지만 가난을 탈피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속적인 가난, 딸의 방에서 자살한 아버지라는 트라우마에 빠질 겨를도 없이 그녀는 오직 생존을 위해 삶의 최전선으로 떠밀린다. 학원강사와 과외의 경력이 쌓이며 소득은 늘어가지만,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와 극단적인 노동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점점 더 위태로워 보인다.
<일인칭 가난>이라는 제목처럼 그녀가 말하는 가난이라는 영역은 각자에게 독립적으로 적용된다. 삶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나마 제도권의 혜택을 누린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가난한 삶 만으로 충분히 서러울 텐데,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 책은 두껍지 않아 금방 읽힌다. 하지만 덤덤한 듯 실제적이고 디테일한 묘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가 알지 못했던, 관심조차 없던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삶의 일부를 본 것 만으로 저들의 힘든 삶이 온몸으로 느껴져서일까. 저자의 삶은 '삶'이 아닌 생존, 투쟁에 가깝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모든 순간이 오직 '살기 위함'에 포커싱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는 스펙(?)이 조금 더 화려하다. 지독한 가난은 물론, 늘 냄새나는 옷과 사이즈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던 어린 시절 그는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저자의 엄마는 삶을 비관하며 장애인 남편과 아들을 버렸다. 대학을 갈 형편이 못 된 그는 모아둔 비상금으로 작가의 꿈을 안은 채 상경길에 오르지만, 사기로 전재산을 잃으며 졸지에 노숙생활을 하게 된다.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시절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했다. 사장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가 여러 차례 얻어맞기도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지금껏 까치발을 들거나 달리기를 하지 못한다고. 한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정밀 검사가 필요했지만, 당시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그는 결국 시각장애인이 된다.
일인칭 가난의 저자의 말투가 건조하고 사실적인데 반해 이 책의 작가는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화법을 구사한다. 'ㅇㅇㅇ에게'라는 식의 편지글의 형태는 읽는 내내 잔잔한 위로와 친근감을 더해주었다. 비록 많이 힘들더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한결같은 희망과 따뜻함의 시선이 느껴진다.
문체와 스타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 불행해 보일법한 이들의 시선이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한다는 게 아닐까.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겉으로는 멀쩡한 삶을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종종 죽음을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경제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눈에 띄게 나빠지는 몸상태는 삶에 대한 의욕을 쭉쭉 떨어뜨린다. 업무 스트레스는 진즉에 극에 달했다. 집안의 기둥인 가장의 어두운 기운으로 인해 온 집안이 침울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언제나 아빠가 힘들지는 않은지 걱정이다.
저마다 삶의 힘든 이유가 다르듯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한 것 같다. 운동을 하는 사람, 술담배로 이겨내는 사람, 종교의 힘을 빌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 등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버텨낸다. 문제는 우리가 겪는 삶의 어려움은 예상할 수 없을뿐더러 끝이 없다는 데 있다. 버틸 수 있는 삶은 한계가 있는데, 고난과 고통은 우리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채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
때로는 책을 읽는 것도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2권의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척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 이런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죽기는 일러요.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나처럼요."
너무나 많은 청년들이 삶을 비관해서 자살을 한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갈수록 죽음이 익숙해지는 시대, 삶이 아닌 죽음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르는 시대에 저들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죽음이 아닌 '삶'을 상기한다.
저자들은 자신의 지난한 삶을 책으로 써내기 위해 힘든 와중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할애했다. 일인칭 가난의 안온 작가는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생존과 직결된 강의와 과외를 그만두었다. 수많은 타이핑 연습을 통해 시각 장애를 극복하며 지금도 '눈을 감고 글을 쓴다'는 소재원 작가를 보며, 나는 내 삶에 한 번이라도 저런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시간이 있는지 돌아본다.
작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권의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개월에서 1년의 기간이 걸린다고 한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 만들어낸 책에는 그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생각과 에너지가 전달되었다. 가난, 장애인 부모, 척박한 삶의 환경에도 굴하지 않은 저들의 삶을 읽는 것만으로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을 향해 조금은 더 부딪혀 보고 싶다는 용기도 생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두려운 현실과 상황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순간에도, 누군가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보며 힘을 냈으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이.